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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7 (화)

‘중국의 자존심’ 베이징원인, 식인종 누명을 벗다 [배기동의 고고학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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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겨진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46> 중국 저우커우뎬(周口店)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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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저우커우뎬 유적 박물관에 전시된 베이징원인 복원 모습. 근육질의 사냥꾼으로 묘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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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남서쪽으로 47㎞ 정도 떨어진 석회암 지대에 용골산(龍骨山)이라고 불리는 나지막한 산이 있고, 이 산 곳곳에 동굴이 있다. 그리고 스웨덴의 고고학자 요한 군나르 안데르손(1874~1960)이 저우커우뎬 발굴(1921~1926년)을 진행해 1923년 최초로 고인류 이빨을 발견했다. 이후 캐나다 고인류학자인 데이비슨 블랙(1884~1934)이 록펠러재단의 연구비로 발굴을 재개, 1929년에 최초의 베이징원인 제1호 두개골 화석이 중국 청년 고고학자에 의해 발굴됐다.

발견 후 100년이 다 돼 가는 이 유적에는 흥미진진한 고고학 콘텐츠가 넘친다. 먼저, 인류 다지역 기원설(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던 호모에렉투스가 진화해 오늘날 호모사피엔스에 이르렀다는 주장)의 증거가 된다. 또 ‘못난이 석기’로 부르는 찍개 석기(한쪽 방향에서만 돌을 내리쳐 날카롭게 만든 것)가 많이 발견되면서 핼럼 모비우스(1907~1987·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주창한 ‘모비우스 라인’ 가설의 핵심 증거가 되기도 했다. 모비우스 교수는 인도를 기준으로 서쪽의 주먹 도끼 문화권(아슐리안ㆍ유럽 아프리카 서아시아 등)과 동쪽의 찍개 문화권(동아시아 아메리카 등)으로 분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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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당시 저우커우뎬 동굴 제1 지점과 지층 단면 광장의 모습. 1989년도. 오른쪽 가방을 멘 이가 조선족 출신의 세계적인 고동물학자인 김창주(金昌柱) 교수다.


필자는 1989년 중국과학원 ‘고척추 동물 및 고인류 연구소’(IVPP)가 주최한 ‘원인 발견 60주년 기념 국제 학회’에 참가하면서 저우커우뎬 유적을 처음 답사했다. 조선족 출신의 세계적인 고동물학자인 김창주(金昌柱) 교수의 안내로 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쏟아지는 동굴 입구에 닿았다. 그리고 회랑 벽에 ‘원인 1호 두개골’이라고 표시된 발견 지점을 목격했을 때 젊은 고고학자로서의 감동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바로 동아시아 인류 진화연구의 출발점이자, 인접한 한반도 인류 확산 시기를 가늠하는 유적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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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커우뎬 유적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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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발굴


최초 발견 이후 무려 100년 동안 많은 고고학자들이 지속적으로 발굴을 시도했다. 이는 고고학사를 통틀어도 흔치 않은 사례다. 앞서 언급한 안데르손과 블랙, 그리고 프란츠 바이덴라이히(1873~1948ㆍ독일)가 주도적이었지만, 베이징대학 졸업(1928년) 후 ‘제1호 두개골’을 발굴한 페이원종(裴文中ㆍ1904~1982), 후일 발굴단장까지 지낸 지아란푸어(賈蘭坡ㆍ1908~2001)등 중국 고고학계의 전설들도 함께했다. 오늘날 활약하는 대부분의 고고학자들도 이들의 학맥을 잇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 오랜 발굴을 통해 40여 개체에 이르는 고인류 화석, 수많은 석기 유물 및 동물 화석이 수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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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동물뼈나 골수를 먹을 때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모루 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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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킹맨(Peking Manㆍ베이징원인)은 발견 당시부터 중국의 자존심이었다. 뇌 용적이 1,000㏄가 약간 넘는 정도이고, 이마가 없어서 낮은 머리에 튀어나온 두툼한 눈두덩이는 대단히 원시적인 모습을 보였다. 베이징원인의 화석 발견 이후, 미국의 지질학자 아마데우스 그라바우(1870~1946)는 인류의 ‘아시아 기원설’을 주장했다. 최초 인류가 마이오세(2,300만 년 전~533만 년 전ㆍ신생대 신제3기(新第三紀) 전반부 지질 시대)에 융기된 히말라야산맥에서 발생해 타림분지(중앙아시아 분지 지역)로 진출한 뒤 흩어졌는데, 동으로 이동한 인류는 중국 시난트로푸스(Sinanthropus)가, 남으로 가서는 자바의 피테칸트로푸스(Pithecanthropus)가, 유럽에서는 필트다운 맨(Piltdown Man)이, 그리고 아프리카에서는 호모(Homo)가 됐다는 것이다. 즉 지난 1960년대에 ‘아프리카 기원설’이 나오기 전까지 이 유적은 ‘중국=인류 발상지’ ‘베이징원인=몽골로이드의 조상’으로 생각하게 했다. 당시 서구 열강에 치였던 중국이 고고학적으로 자존심을 세울 수 있었던 인류 화석이었던 셈이다. 심지어 마오(毛) 시대에도 이 베이징원인은 마르크시즘의 상징적인 존재로 간주돼 학교에서 가르쳤다. 그 덕분에 1960년에 중국과학원 산하에 ‘고척추 동물 및 고인류 연구소’가 설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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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원인 제1호 두개골 복제품. 원본은 사라지고 없는 상태다. 특히 발굴 당시 주변에는 정수리뼈만 남아 '식인 풍습' 학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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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화석, 어디로 갔을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초기에 발굴된 베이징원인 화석은 1941년에 모두 사라졌다. 당시 중일전쟁이 격화되고 일본군이 베이징을 점령했다. 이에 40여 개체의 인류 화석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미국 뉴욕의 자연사박물관에 보내기로 했다. 그래서 베이징의 관문 항구였던 친황다오(秦皇島)로 가는 기차에 실었는데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온갖 루머가 난무했다. ‘미국행 배에 실렸으나 일본 해군의 공격으로 바닷속에 가라앉았다’ ‘일본 병력 수송선 아와마루(Awa Maru)에 실린 것을 봤다’ ‘미군 병사가 친황다오 지역 군 막사 건물 바닥에 묻힌 것을 봤다’ 심지어 ‘가루가 돼 한약재로 팔렸다’ 등등…

이 인류사의 보물을 찾기 위해 엄청난 상금까지 걸었으나, 아직도 그 행방을 알 수가 없다. 한때 ‘이 화석들을 연구하던 바이덴라이히의 연구실에서 목격됐다’며 ‘음흉한 학자’라는 비난까지 나오는 등 난리가 났지만 이는 결국 복제품으로 판명 났다.

그나마 오늘날 베이징원인 화석의 비교연구는 바이덴라이히의 복제품이 있어서 가능하다. 이 희대의 화석 분실과 소재 탐문의 과정은 인기 추리소설의 주제였다. 그리고 아직도 대륙 간 고인류 화석 이동을 꺼리게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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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발굴 현장의 모습. 뒤쪽 흰색 선으로 그려진 사각형 모양은 유물의 위치를 구분하기 위한 단위다.


베이징원인, 정말 식인종인가?


저우커우뎬 동굴의 ‘카니발리즘(식인) 논란’은 앙리 브뢰유(1877~1961)라는 프랑스 고고학자가 1929년 처음 제기했다. 몸체 뼈는 별로 없는데 두개골 뼈만 많다는 것이 근거였다. 지금으로는 웃을 일이지만 브뢰유는 ‘힘센 고인류가 사람을 잡아먹고 그 트로피로 두개골을 남긴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프랑스 고고학자 불(Boule)은 ‘석기를 만들 줄 아는 진화한 고인류가 작은 두개골을 가진 원시적 베이징원인들을 잡아먹었다’라고도 했다. 또 두개골의 정수리뼈만 발견되는 것은 바로 ‘뇌수를 식인 인류들이 먹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여기에 고인류 화석 중 불에 탄 뼛조각들이 발견되자 ‘불에 구워 먹었을 것’이라는 등 ‘저우커우뎬 동굴은 식인종 소굴’이란 생각이 널리 퍼졌다.

고인류학에서 이러한 주장이 한번 제기되면 이를 검증하는 데는 훨씬 길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이 검증 기간 ‘검은 신화’는 꾸준히 지속되는 것이 보통이다. 실제로 스페인의 아타푸에르카 유적이나 크로아티아의 크라피나 유적 등 세계 유수의 고인류 화석 유적을 둘러싸고 ‘식인 풍습’ 주장이 여전하다. 아직도 ‘원시시대=야만적일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고인류학 학문에 있어서 설명의 편의성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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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커우뎬 동굴 중간층에 불에 탄 재층이 보인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외부에서 유입된 미세한 먼지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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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에나, 식인 누명을 벗기다.


‘식인 풍습’ 주장에 의구심이 제기된 것은 뜻밖에도 하이에나 덕분이었다. 1939년 오스트리아 빈 동물원의 하이에나가 소뼈에 남긴 이빨 흔적이 저우커우뎬 동굴 화석에 남은 흔적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 보고되면서다. 바이덴라이히는 일부 뼈에 대해서는 이런 주장(하이에나에 의한 훼손)을 받아들였지만, ‘정수리뼈만 남은 두개골이나 세로로 쪼개진 다리뼈는 설명할 수가 없다’며 식인 풍습을 여전히 인정했다. 하지만 신고고학자 루이스 빈포드(1931~2011ㆍ미국)는 접시같이 남겨진 두개골 뼈 역시 하이에나에 의해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식인 행위를 일축했다.

구석기시대의 동굴은 사람만 사용했던 것이 아니라, 하이에나, 곰 등 맹수류가 시간을 두고 교대로 살기도 한다. 그래서 증거들을 세밀하게 관찰하지 않으면 엉뚱한 오류를 범한다. 실제로 불을 사용한 증거로 주장된 재(灰)층의 경우, ‘동굴의 바깥에서 안으로 빨려 들어간 먼지층’으로 판명됐다. 그러고 보면, 저우커우뎬 동굴 유적은 각종 고인류학 학설의 ‘반전의 반전’을 낳은 현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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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커우뎬 샨딩동(山頂洞) 입구. 호모사피엔스가 살았던 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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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도 베이징원인의 유전자가?


이렇듯 지난 100여 년 동안 베이징원인과 관련된 초기 학설들이 하나둘씩 무너졌다. 다만, 예전에 폐기됐던 ‘베이징원인은 몽골로이드(아시아인)의 조상’이라는 주장은 오늘날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절멸종으로 생각했던 호모에렉투스(베이징원인) 역시 다른 인류종, 즉 데니소바인이나 호모사피엔스 등 인류종과 짝짓기를 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절멸종인 데니소바인ㆍ네안데르탈인 유전자가 현대인에게 남아 있다는 것이 확인됐다. 그러므로 50만 년이라는 저우커우뎬 유적의 시간 범위 내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또 데니소바인이 오늘날 동북아 지역에서 출현해 확산했다면, 분명 베이징원인으로 분류된 고인류 화석 중에 데니소바인 화석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앞으로 과학의 발전에 따라서 새로운 반전, 즉 몽골로이드라고 부르는 아시아인의 기원 비밀이 밝혀질 수도 있다. 이런 상상을 하며 저우커우뎬 동굴 속에 서 있노라니, 나이 든 고고학자의 가슴도 뛴다.

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한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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