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9.17 (화)

"나는 실패자"라는 대만 퀴어 소설가, 한국을 홀렸다..."슬프고 어두워서 미안하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귀신들의 땅’ 쓴 성소수자 대만 소설가 천쓰홍
“책 읽은 한국 도처의 성소수자로부터 연락 와
보수적 사회에서 문학은 청춘의 영혼 구원해”
한국일보

소설 '귀신들의 땅', '67번째 천산갑' 작가 천쓰홍이 9일 서울 중구 달개비에서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천쓰홍은 서울국제작가축제의 초청으로 내한했다. 뉴시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사실 저는 실패한 작가이고 실패한 소설을 썼고 이걸 실패한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습니다.”

장편소설 ‘귀신들의 땅’에 이어 ‘67번째 천산갑’으로 한국 독자와 만난 대만 소설가 천쓰홍(48)은 9일 서울 중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만의 외딴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성소수자이자 ‘굶어 죽기 십상’인 소설가를 직업으로 택한 실패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도 그는 “실패한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조금 더 자유롭게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가부장제에서 성소수자·여성 모두 2등 시민”

한국일보

대만 소설가 천쓰홍이 9일 서울 중구에서 진행된 기자간담회에 앞서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민음사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자신을 실패자라고 말하는 천쓰홍의 책 ‘귀신들의 땅’은 대만 유수의 문학상을 거머쥐고 지난해 12월 한국에 번역되어 1만5,000부 이상이 팔렸다. 초판(1,000~2,000부)도 채 다 나가지 않는 책이 허다한 문학계에서 504쪽에 달하는 대만 소설의 인기는 그야말로 사건이었다. 지난해 대만에서 출간된 ‘67번째 천산갑’이 곧바로 한국에 나온 배경에도 이런 이례적인 현상이 있다. 천쓰홍은 “한국에 ‘귀신들의 땅’이 출간되고 나서 도처의 한국 성소수자에게 연락이 왔다”라고 전했다. “한국이 아닌 대만 농촌을 다룬 대만 소설임에도 그 속의 고통이 사실은 ‘나의 고통’이었다는 것을 느꼈다고 하더라”는 것이 그의 말이다.

고통은 ‘천쓰홍 문학’의 요체다. 일곱 명의 누나가 있는 대가족의 막내아들이자 성소수자인 작가 자신의 삶을 기반으로 가족의 수난사를 쓴 ‘귀신들의 땅’에 이어 아역 배우로 만나 평생의 관계를 맺는 헤테로 여성과 게이 남성을 그린 ‘67번째 천산갑’까지. 이는 “가부장제에서 모두 2등 시민으로 취급”되는 성소수자와 여성에 대한 차별에 있어 작가가 당사자이자 목격자이기 때문일 테다. 그는 “남존여비가 강한 구시대의 대만에서 부모님은 누나들에게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며 “(딸들은) 낳고 싶지 않았고 낳았으니 키우는 존재였다”고 회상했다.

“눈물과 슬픔의 힘을 믿는 ‘슬픈 소설’”

한국일보

67번째 천산갑·천쓰홍 지음·김태성 번역·민음사 발행·492쪽·1만8,000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67번째 천산갑’에는 중화권 온라인 용어로 '여성의 남성 성소수자 친구'를 뜻하는 게이미(gay蜜)라고 표현할 수 있는 두 주인공이 등장한다. 천쓰홍은 “동성애자 남성과 이성애자 여성 사이의 미묘한 결탁과 보살핌이 존재하는 경우는 너무도 많다”라며 “여성들은 나의 고독을 간파하고, 여성으로서의 고독과 어려움을 내게 말해준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여성에게 적용되는 사회적 ‘기준’이 판이하다고 소설은 짚는다. 나란히 같은 광고와 영화를 찍은 아역 배우임에도 여자주인공을 향한 온갖 성적 조롱이나 외모에 대한 압박에서 남자주인공은 예외다.

천쓰홍은 여자주인공을 향한 사회의 가혹한 시선을 K팝에 빗대기도 했다. 그는 “K팝이 무조건 예쁘고 말라야 한다고 여성의 신체를 억압하는 면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사람은 누구나 늙는 만큼 30년 후의 아이돌도 모두가 좋아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국일보

한국을 찾은 대만 소설가 천쓰홍이 9일 서울 중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앞서 사진을 찍고 있다. 민음사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미리 사죄의 말씀을 드리겠다”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천쓰홍의 소설은 “슬프고 어둡다.” 신작 역시 “독자들에게 ‘울고 싶으면 크게 우세요’라고 말하는 소설”이라고 말한 그는 ‘눈물과 슬픔의 힘’을 믿는다. 성소수자로 여러 슬픔을 겪었지만, 소설이나 영화로 천천히 자신감을 얻은 자신처럼 자신의 소설을 읽고 마음껏 슬퍼하고 울며 자란 이들 역시 그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는 덧붙였다. “보수적인 사회에서 영화나 문학은 확실히 청춘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그러리라 믿습니다.”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