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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7 (화)

내수 침체기에 부동산 들끓는 호주와 한국의 '불편한 오버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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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연 기자]

우리나라와 호주 경제가 비슷한 상황에 놓였다. 정부 주요 인사들이 금리인하를 압박하고, 중앙은행 총재는 여기에 반기를 든 모양새다. 두 나라의 통계상 물가 수준이 달라 보이지만, 지표상 부동산 비중을 고려하면 다를 것도 없다. 호주 정부가 중앙은행장을 저성장의 희생양으로 낙인찍은 이유를 자세히 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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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수가 침체하고 있는데 부동산은 끓고 있는 호주.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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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수 부진으로 경제가 32년 만에 최저 성장을 하면서도 부동산 가격은 끊임없이 오르는 나라. 중앙은행장이 금리를 내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연일 집권 여당 주요 인사들의 막말에 시달리는 나라. 그런데도 부동산 가격은 여전히 상승하는 나라. 이 나라는 어딜까.

우리나라와 비슷하지만, 우리 얘기는 아니다. 호주 얘기다. 호주 전·현직 재무부 장관은 미셸 블록 호주중앙은행(RBA) 총재를 경기침체의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다. 호주 경제가 제로에 가까운 성장률을 오랜 기간 유지하고 있는 데다 블록 총재가 정부의 기준금리 인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집권당이 직접 임명한 중앙은행장이라는 괘씸죄도 거들었다.

■ 호주의 상황=호주 통계청이 지난 4일(현지시간) 발표한 2분기 GDP는 전분기 대비 0.2% 증가에 그쳤다. 1분기에도 고작 0.1% 성장했다. 지난해 3·4분기에는 각각 0.2% 늘어나는 데 머물렀다. 이렇게 가면 올해 성장률은 역대 최저치를 경신할 것으로 보인다. 호주의 지난해 성장률은 1.5%로 팬데믹 기간을 제외하면 32년 만에 최저치였다.

호주의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올해 1분기까지만 해도 안정적으로 내려왔지만, 4~6월 재상승했다. CPI 상승률은 3월 3.5%까지 내려왔지만, 5월에 4.0%로 상승했고, 6월과 7월에 각각 3.8%, 3.5%로 진정세를 보였다.

호주 물가가 우리나라와 달리 불안정한 이유는 부동산 가격의 재상승분을 CPI에 비교적 잘 반영하기 때문이다. 부동산 정보회사인 코어로직에 따르면, 호주 주거비(매매·임대 등)의 CPI 비중은 22.0%다. 2022년 기준으로 미국은 물가지수에서 주거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32.0%고, 한국은 9.8%(월세 4.4%+전세 5.4%)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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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집권 여당인 노동당 주요 인사들이 저성장의 희생양으로 중앙은행장을 점찍었다. 미셸 블록 호주중앙은행(RBA) 총재 모습(사진 왼쪽). 우리나라 8월 물가상승률이 2.0%를 기록했지만, 이창용 총재를 포함한 한국은행 주요 인사들은 “금융 안정”을 금리인하의 조건으로 내걸었다.[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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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호주 주택 가격은 2023년 한해 동안 8.1% 상승했고, 시드니 기준으로는 올해와 내년에도 각각 4.5%, 5.5% 더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마디로 호주중앙은행(RBA)이 앞으로 물가가 더 내려올 것을 확신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 희생양 만들기와 역풍=사실 호주 경제는 우리나라보다는 여러 면에서 더 나은 상황이다. 저성장과 역성장이라는 큰 차이가 있다. 부동산 과열 수준도 마찬가지다. 부동산 시장 과열도 우리나라가 더 심각하다. 김웅 한은 부총재보는 지난 8월 28일 "6월 이후 서울 아파트 가격의 상승률은 연간으로 따지면 15%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호주의 중앙은행장을 향한 비난은 우리보다 더 강력했다. 예고편부터 막장이었다. 짐 차머스 재무장관은 경제성장률 발표를 앞둔 지난 2일 "금리인상이 경제를 붕괴(smashing)시켰다"며 RBA를 강하게 비난했다.

웨인 스완 전 재무부 장관은 6일 수위를 더 높여 "(RBA가) 가계를 망쳤고(hammering), 부모들을 높은 금리로 망쳐놨고, 소비를 붕괴시켰고, 경제를 후퇴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노동당의 한 고위직 인사는 같은 날 국영방송 ABC와의 인터뷰에서 "RBA는 괴상한 야만인들이고, 블록은 미친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그런데 집권당의 강경 발언과 희생양 만들기가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가능성이 증가하고 있다. 우선, 짐 차머스 재무부 장관은 집권당 내 정치싸움을 벌인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재무부 장관 스스로가 불과 1년 전에 중앙은행장으로 임명한 게 미셸 블록 총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경제 상식과 배치되는 주장이라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중앙은행은 물가를 관리하는 곳이지, 경제성장을 책임지는 곳이 아니다.

월스트리트저널도 6일 "호주 정부가 재집권을 위해서 통화정책을 쓴다면, 글로벌 투자자들에게 다른 투자처를 알아보라고 말하는 격"이라고 꼬집었다.

■ 이창용과 블록의 이유=호주와 한국의 물가상승률 수준이 3%대와 2%대로 차이가 나 보이지만, 언급했듯 호주 물가 지표의 주거비 비중은 22.0%, 한국은 고작 9.8%에 불과하다.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고 있는 두 나라의 물가 수준은 결과적으로 큰 차이가 나지 않을 수 있다.

블록 총재가 금리 인하를 단호하게 반대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블록 총재는 지난 6일 한 연설에서 "물가 목표인 2~3%를 확신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준금리를 내리면, 실업 증가로 경기침체가 더 심화할 가능성이 있다"며 "금리가 경제를 파괴한다는 (재무부 장관의) 말은 전적으로 옳은데, 그게 원래 금리의 의미"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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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하나는 인플레이션의 가장 큰 피해자들을 위해서다. 블록 총재는 "높은 물가는 경제적으로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준다"며 "젊은 가구와 저소득가구는 고물가 상태에서 생활비 압박을 가장 많이 받는다"고 말했다. 금리를 섣불리 낮추면 물가가 치솟아 취약층을 더 괴롭힐 수 있다는 거다.

이창용 총재는 지난 3일 "물가 안정 측면에서는 기준금리 인하를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시기가 됐다"며 "금융안정 등을 봐서 어떻게 움직일지 적절한 타이밍을 생각해볼 때"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총재는 임기 내내 부동산 가격 상승과 이에 따른 가계대출 증가세를 경계했다. 숨은 물가상승률을 고려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한국은행도 인플레이션의 피해자에 주목하고 있다. 한은이 9월 5일 발표한 '경제 지표의 그늘, 체감되지 않는 숫자' 보고서는 "소득분위별로 해당 계층이 실제로 직면하는 물가상승률(실효 물가상승률)을 계산해보면, 최근 물가 상승기에 저소득가구가 고소득 가구보다 물가 부담이 더 컸다"고 분석했다.

한정연 더스쿠프 기자

jeongyeon.han@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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