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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8 (수)

이제는 적정시민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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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조건준 | 아무나유니온 대표



다만 하나의 몸짓은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다가와 꽃이 된다. 시인의 얘기다. 다만 익명이던 존재는 호명되었을 때, 비로소 다가와 주체가 된다. 철학자의 얘기다. 이름을 알지 못하고 시선이 닿지 않았더라도 이미 거기 있지 않았던가. 자연계가 그렇다. 하지만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시선이 닿는 존재가 되는 것이 인간계다.



​부모는 자식의 미래를 생각해 이름을 짓는다. 국가도 시민에게 이름을 붙인다. 통치에 적합한 인간 유형을 만들기 위해서다. 일제는 조선인을 황국신민으로 부르며 개조하려 했다. 국가를 세우다가 반쪽에 부딪친 이승만은 반공으로 무장한 우익국민을 원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국민교육 헌장을 만들어 충성하는 국민을 육성하려 했다.



시민은 권력이 부르는 대로 살지 않았다. 서로를 ‘민주시민’으로 부르며 권력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던 노태우는 ‘보통 사람’으로 자신을 포장했지만, 더 근본적인 변화를 원한 이들은 민중과 계급의 이름을 원했다. 21세기에 들어서 각자도생하는 개별 시민이 늘었다. 대통령을 바꾼 촛불 시민이 시대를 담은 이름을 남겼을까. 요즘 언론의 여론조사는 빨간 시민과 파란 시민을 두드러지게 한다. 이제 우리는 서로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할까.



무한성장하는 인간은 없다. 어른이 되어서 살찌고 몸무게가 늘어나면 비만이라며 질병으로 여긴다. 성장이 끝나면 적절한 영양을 섭취하면서 신체 균형을 유지하려고 한다. “건강하세요” “건강이 최고”라는 얘기는 신체의 적정 상태를 바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생물학적 적정성이 필수적이다.



우울증, 조울증, 조증 등에서 우울증은 돌봄을 요청하는 신호라고 한다. 우울증도 생존을 위해 필요했다는 것. 하지만 우울 상태의 지속과 반복은 심리적 적정성의 상실이다. 비교 경쟁에 찌들면 우월감과 열등감, 특권과 무권리 너머 공생의 자존감을 키우기 어렵다. 깨지고 상처받은 영혼이 늘어난 현대사회에서 심리적 적정성이 절실해졌다.



화폐를 추앙하는 시장경제는 사회를 집어삼키며 확장되었다. 긴 인류사에 두 세기에 불과한 고도성장기에 생긴 일이다. 공황, 세계대전, 공산주의를 겪으며 인류는 시장의 위험을 느끼고 통제했다. 위협이 사라진 듯 보이자 다시 탄소를 뱉어내며 성장 중독을 드러냈다. 급기야 기후위기를 불러왔다. 무한성장과 탈성장 사이에서 적정경제를 찾아야 한다.



선거에서 떨어지더라도 다시 기회가 열려 있어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뤄질 때 민주정치가 가능하다. 하지만 기본이 무너지고 있다. 양당정치는 서로를 범죄자로 만든다. 권력을 잃으면 죽거나 감옥 갈 테니 권력투쟁이 격하다. 기후위기나 불평등 해결에 진심일 수 없다. 일제를 둘러싼 퇴행적 논쟁은 미래에 대한 상상력 빈곤을 보여준다. 낡은 진영에 새로운 질적 발전은 없다. 지금 긴박한 문제에 맞는 적정정치가 필요하다.



시장을 맹신한 자본주의는 공황으로 망하고, 시장을 제거한 공산주의는 토대가 망한다는 것을 역사가 보여주었다. 시장이냐 국가냐 하는 논쟁은 사람들을 설득할 내용이 빈약해 ‘좌파’나 ‘극우’라는 이름의 적을 만들어 표를 얻으려는 식상한 선동이다. 기초연금, 최저임금, 4대 보험 등 사회주의적인 것, 주식과 코인과 부동산 영끌 투자 등 자본주의적인 것이 뒤섞인 세상이다. 시장이나 국가 중 하나에 대한 편향적 집착을 넘어 적절하게 배치하고 조합하는 식견과 역량이 적정사회로 인도할 것이다.



한반도의 특수성을 생각하면 패권국가도 종속국가도 아닌 적정국가가 우리에게 맞다. 반중 반북에 열을 올리거나 반미 반일에 핏대를 세우면 도달할 수 없는 비전이기에 적정외교를 요구한다. 인간과 생물 모두를 다양한 존재로 인정하며 문명과 생태계를 조화시키는 지구적 적정성이 필수다. 너무 덥지 않고 너무 춥지 않은 지구는 생명 탄생의 우주적 적정성을 보여준다.



​생태계와 인류의 파국을 보아야 잘못을 깨달을까.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전환은 새로운 시민의 탄생에 달려 있다. 특권과 무권리 양극으로 사회를 해체하는 힘을 이겨내야 적정 상태에 이르듯 적정성은 대충 오지 않는다. 하지만 생물학적, 심리적,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외교적, 지구적, 우주적 차원에서 요구하는 적정성은 자연스러운 비전이다. 이를 실현할 주체로서 지금 필요한 시민의 이름은 ‘적정시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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