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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8 (수)

[안혜리의 시선]김건희 여사의 민생 행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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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치곤 좀 공교롭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취임 후 세 번째이자 110일 만의 공식 기자회견에서 "나도 검사 시절 전직 대통령 부인을 사저로 찾아가 조사한 적이 있다, 조사 방식이 정해진 게 아니다"라며 당시 불거진 '김건희 여사 비공개 출장 검찰 조사' 특혜 논란을 부인한 바로 그 날, 김건희 여사가 일주일 전(23일) 갔던 쪽방촌 봉사 사진이 '우연히' 공개됐다.

중앙일보

'생명의 전화' 살펴보는 김건희 여사 (서울=연합뉴스) 진성철 기자 = 김건희 여사가 10일 '세계 자살 예방의 날'을 맞아 서울 마포대교에서 마포경찰서 용강지구대 근무자와 함께 '생명의 전화'를 살펴보며 대화하고 있다. 2024.9.10 [대통령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zjin@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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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란 표현을 쓴 건 대통령실이 보도자료를 공식 배포한 게 아니라 쪽방촌 봉사를 조직한 '행복나눔봉사회'가 마침 이날 도배 작업 중이거나 마을 청소하는 김 여사 봉사 사진 여러 장을 블로그에 올렸기 때문이다. 블로그는 사진과 함께 "폭염주의보가 발령된 한낮의 서울역 쪽방촌에서 4시간가량 봉사했는데, 김 여사는 땀이 이마를 적시는 와중에도 표정은 밝았다"며 "서툴지만 성실히 벽지를 붙이는 김 여사 모습에 주민들이 흐뭇해했고, 의미 있는 울림을 줬다"는 내용을 적었다.



쪽방촌 봉사 이어서 구조대 격려

좋은 취지에도 부정적 여론 높아

논란 사과 없으면 진정성만 의심

평소 댓글과 '좋아요'가 거의 없는 한적한 블로그인데도 어떻게 알았는지 일부 매체가 이런 내용을 담아 기사화했다. 대통령실은 또 기사가 나온 뒤 '뒤늦게'서야 "김 여사가 1365 자원봉사포털을 통해 일반 국민과 똑같은 절차를 거쳐 성사된 개인적 봉사로, 최소한의 수행원만 동행했다"고 밝혔고, 이게 또 더 많은 후속 보도로 이어졌다.

블로그에 담긴 노골적인 김 여사 찬사가 좀 낯간지럽긴 하지만 낮은 데 임한 김 여사 행보 자체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국민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저열한 몰카 공작이나 하는 친북 목사와 본인 권한 밖의 대북 정책을 논하는 것보다야 백배 천배 칭찬받을 일 아닌가.

그런데도 이날 SNS 분위기는 달랐다. "얼굴 보기 싫다"며 평소 맹목적 반감을 표시하는 '묻지 마 악플' 부류의 포스팅에 더해 "명품백 논란을 가리려는 쇼"라는 식으로 칭찬보다 비판 목소리가 더 컸다. 쪽방촌 방문을 "빈곤 포르노"라며 손가락질한 경우도 있었지만, 봉사 내용 자체보다 김 여사의 '민생 행보'를 노출한 시기와 방법이 이런 부정적 여론에 더 영향을 끼친 게 아닌가 싶다.

그도 그럴 것이 앞서 이날 대통령 기자회견에서 논란 많은 제2부속실 설치 관련 질문이 나왔을 때 윤 대통령은 "마땅한 장소가 없다, 청와대만 해도 배우자 쓰는 공간이 널찍한데 용산은 그런 공간이 없다"고 답해 듣는 이들을 뜨악하게 만들었다. 지난 대선에서 윤 대통령을 찍었던 지지자들 사이에서조차 찬반이 팽팽했던 청와대 용산 이전을 막대한 세금 들여 무리하게 강행해놓고는, 영부인 일정을 공적으로 통제할 부속실을 당장 못 만드는 이유로 용산의 비좁은 공간을 드니, 이 설명을 듣고 대통령실 입장을 이해하게 됐다기보다 부정적 여론만 더 키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 김 여사의 쪽방촌 봉사 사진이 튀어나왔고, "언론플레이로 비판 여론을 잠재우려는 것이냐"는 뒷말이 나온 것이다.

영부인 행보를 노출하는 방식도 그렇다. 김 여사는 지금껏 본인에게 불리한 여론이 끓어오르면 공식 석상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대신 '우연히 어딘가에서 찍힌 사진'같은 변칙적 언론 노출을 반복해왔다. 그러다 부정적 여론이 잠잠해졌다 싶으면 광폭 행보를 다시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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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서울역 쪽방촌에서 도배 중인 김건희 여사. 행복나눔봉사회는 29일 “김 여사가 자원봉사를 위해 방문했다”고 공개했다. [사진 행복나눔봉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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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실 공식 홈페이지의 뉴스룸 사진뉴스 코너만 봐도 알 수 있다. 사저에서 친북 목사에게 받은 명품백을 둘러싼 검찰 수사 국면 등 비판 여론이 우세한 시기엔 김 여사가 공식 석상에 등장한 행사라도 메인 화면에서 얼굴 찾기 어렵다. 하지만 지난 6일 검찰 수사심의위원회가 명품백 수수와 관련 불기소 권고를 하자마자 대통령실 사진뉴스 코너엔 김 여사 비중이 확 커졌다.

가령 지난 10일 김 여사 혼자 서울 광진구와 마포구 일대 구조 현장을 찾은 사진을 무려 18장이나 올리면서 "김건희 여사는 세계 자살 예방의 날을 맞아 119특수구조단 뚝섬수난 구조대, 한강경찰대 망원치안센터, 용강지구대를 각각 방문해 생명 구조의 최일선에 있는 현장 근무자를 격려했다"고 설명을 달았다.

당장 "대통령 같은 행세"라는 비판이 나왔다. 공개한 사진을 보면 어려운 일 하는 현장 근무자를 챙기는 민생 행보라기보다 어쩐지 상급자의 현장 시찰 느낌이 물씬 나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김 여사는 이날 현장 근무자들에게 "선제적 대응을 당부"하고 순찰인력과 함께 마포대교 도보 순찰에 나서 "추가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했다고도 한다.

대통령실은 분명 "격려 방문"이라는데 이런저런 뒷말이 나오는 건 결국 대다수 국민이 진정성을 믿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민생 행보도 좋지만 사과가 우선이라는 뻔한 얘기를 또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중앙일보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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