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9.18 (수)

[김현기의 시시각각] 22년만의 국빈 방일 가능할까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천황의 과거사 발언은 무게감 달라

일 정부 짐 덜고 우린 실리 챙기는

양국에 윈-윈 되는 최적의 절충카드

중앙일보

김현기 논설위원


#1 열흘 전쯤 일본 도쿄로 짧은 출장을 갔다가 두 가지에 놀랐다. 첫째는 은행 ATM기. 돈을 꺼내려고 은행 현금카드를 넣으니 '인출 불가'란다. ATM기 옆에 붙어 있는 인터폰으로 문의하니 "당신 (외국인) 재류카드의 만기가 한 달 지났다. 갱신된 재류카드를 갖고 창구로 오라"고 했다. 예전에는 생각도 하지 못할 일이다. 한 달은커녕 이미 10년 전, 20년 전에 재류 자격이 정지됐어도 그 정보가 은행과 공유되지 않는 나라가 일본이었다. 시스템이 따로따로였다. 그래서 오래된 은행 계좌, 운전면허증, 의료보험증도 그대로 사용 가능했다. 여전히 그런 줄 알았다. 한국판 주민등록증에 해당하는 '마이넘버 카드'의 도입, 그리고 행정 시스템의 IT 통합화가 몰고 온 놀라운 결과다.

둘째는 은행 창구의 대응. 인출이 불가능해졌으니 아예 계좌를 해지하고 돈을 찾아가겠다고 하자 직원은 "통장 개설 때 사용한 도장을 제시하라"고 했다. "20년 이상 세월이 지났는데 그때 도장이 어디 있겠는가. 무엇보다 본인이 직접 왔으면 돈은 돌려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져도 "매뉴얼에 그리 돼 있다"며 친절하게 거절한다. AI 시대에 도장 파워가 본인 혹은 신분증보다 위인 나라다. 큰 시스템은 바뀌었지만, 현장의 매뉴얼은 그대로다. 90분간의 지루한 공방 끝에 지점 책임자가 내놓은 절충안은 기가 막혔다. "그럼 다른 도장을 아무거나 파 오세요." 그랬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책임을 피할 수단이었다. 그걸 알고 끈기있게 우기면 물러설 줄 아는 나라가 일본이다. 좋게 말하면 말이 통하는 나라다. 시종 고압적인 북한이나 중국과는 다르다.

중앙일보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6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방한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한일 정상회담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2 이는 한·일 외교에도 시사점을 준다. 윤석열 정부 들어 양국 관계의 큰 틀은 극적으로 변했다. 시스템이 확 변한 셈이다. 하지만 외교 현장의 매뉴얼은 그대로다. 당장 국교 정상화 60년을 맞는 내년이 문제다. 한국은 1998년의 김대중-오부치 선언에 버금가는 획기적 공동선언을 희망한다. 하지만 일본은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다. 공동선언을 내려면 과거사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고, 사과의 수위와 표현을 두고 또 실랑이를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사과는 불가능하다"는 매뉴얼 속에 일 외무성 관료들이 '총대'를 메고 나설 가능성은 희박하다. 설령 한다 해도 그 수위는 한국 국민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들의 책임을 덜어주면서 동시에 대체안을 마련하도록 하는 '푸시'가 필요하다. 난 그게 일본의 윤 대통령 국빈 초청이라고 본다. 한국 대통령의 국빈 방일은 전두환(1984년), 노태우(90년), 김대중(98년), 노무현(2003년) 이후 무려 21년간 끊긴 상태다. 무엇보다 내년에 22년 만에 국빈 방문을 하게 되면 일본 천황과의 만남이 이뤄지고, 이때 '오코토바'라고 불리는 천황의 양국 관계에 대한 발언이 나온다. 천황의 입에서 나오는 과거사 발언은 무게감이 다를 수밖에 없다. 또 자연스럽게 그에 맞춰 양국 정부 간에도 공동 발표문이 나올 공산이 크다. 못다 한 말들이 있으면 일본 의회연설에서 할 수 있다. 한마디로 형식이나 책임 면에선 일 외무성이나 정치인들이 반걸음 뒤로 빠질 수 있고, 우리로선 60주년에 걸맞은 결과물을 대부분 챙기는 모양새가 될 수 있다. 국내의 '친일 굴종 외교' 공격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중앙일보

지난 2003년 6월 6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당시 아키히토 일본 천황 주최 만찬에서 건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단, 1년에 국빈 초청을 두 번 이내로 제한하는 일본의 관례상 다소 서두를 필요는 있다. 당장 새로운 미국 대통령의 국빈 방일을 우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년 봄 오사카 엑스포의 한국관 오픈에 맞춰 가거나, 새로 뽑힌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견제할 수 있는 전략적 시기 선택도 좋겠다. 다시 말하지만 일본은 우겨야 물러선다. 아니, 우긴다기보다 물러서지 않고 설득하면 된다. 고분고분 '좋은' 사람 행세만 하면 그들은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다. 습관적 관성이다. 최근의 한·일 외교 결과를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김현기 논설위원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