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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8 (수)

[설왕설래] ‘벙커 부장’과 ‘벙커 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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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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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들 사이에서 쓰이는 ‘벙커’라는 은어가 있다. 골프장의 ‘벙커 해저드’에서 나온 말로 보인다. ‘벙커 부장’은 엉뚱한 질문을 던지거나 지시를 하는 등 수시로 ‘쪼는’ 부장판사를 일컫는다. 배석판사들이 함께 근무하기를 꺼릴 수밖에 없다. ‘벙커 부장’으로부터 탈출을 꿈꾸겠지만, 골프장에서 ‘벙커’가 그렇듯 탈출이 쉽겠는가. ‘벙커 부장’ 중에는 실력 있는 부장판사들이 많았다. 후배들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는 의욕이 앞서다 보니 ‘벙커’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쪼아대지 않았을까 싶다.

요즘 법원에서 유능한 판사가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는 한탄이 나온다. 2013년 본격 시행된 법조 일원화가 부른 결과라는 지적이 많다. 법조 일원화는 사법연수원 수료 즉시 판사로 임용하던 방식을 바꿔 일정 경력 이상의 법조인을 판사로 뽑는 제도다. 경험이 풍부한 법조인을 판사로 임용해 사법부 신뢰를 높이자는 취지다. 속내는 2009년 도입된 로스쿨 제도 탓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로스쿨 수료자를 바로 판사로 임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법시험은 2017년을 끝으로 폐지됐다.

사법연수원 시절 성적 우수자들은 대부분 판사직으로 진출했다. 지금은 대형 로펌들이 로스쿨의 인재들을 싹쓸이하고 있다. 게다가 법조 경력 5년 이상이라야 판사로 임용될 수 있는데, 로펌 변호사들이 급여가 절반 이하로 깎이는 판사직을 희망하겠는가. 뛰어난 실력으로 두둑한 연봉을 받는 변호사일수록 법원을 외면할 수밖에 없다. 김명수 대법원장 시절 사법농단 단죄로 유능한 법관들이 대거 법원을 떠났고 고법부장 승진제 폐지, 법원장 추천제 등으로 판사들이 열심히 일할 동력도 사라졌다.

지방법원 한 재판부의 부장판사가 배석판사 문제로 법원 고충처리위원회와 상담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장판사는 배석판사가 일을 떠넘기는 일이 잦아 함께 일하기 힘들다고 하소연했다고 한다. 부장판사 말이 옳은지, 과잉반응이 아닌지는 당사자가 아닌 이상 알 도리가 없다. 그래도 법원에 ‘벙커 배석’이라는 말이 나올 때가 된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박희준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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