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현지시간) 제84주년 ‘영국 전투의 날’을 맞아 영국 공군 장병들이 제2차 세계대전 기념비에 바칠 화환을 들고 서 있다. 영국 공군 홈페이지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히틀러의 핵심 측근인 헤르만 괴링 공군 원수는 영국 공습에 ‘독수리 공격’이란 이름을 붙였다. 본격적인 전투는 1940년 8월13일 개시했다. 독일 공군은 엄청난 규모의 전투기와 폭격기를 동원해 영국을 공격했으나 성과는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영공 방어에 나선 영국 전투기 성능이 독일 것보다 우수했기 때문이다. 공중전이 벌어질 때마다 격추되는 독일 군용기 숫자가 늘 더 많았다. 숙련된 조종사는 워낙 중요한 자원이어서 전사하거나 부상하면 한동안 대체가 어려웠다. 전투가 계속되며 영국 공군도 조종사 부족을 겪었으나 그래도 훈련과 충원 면에서 독일에 비해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그 시절 히틀러의 나치즘에 맞서 싸우는 자유 진영의 전사는 영국 공군 조종사들뿐이었다. 훗날 처칠이 “인류의 전쟁터에서 그렇게 적은 사람들(조종사)에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큰 빚을 진 적은 일찍이 없었다”고 찬사를 바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밀고 밀리는 처절한 공중전은 1940년 9월15일 절정에 달했다. 그날 독일 공군은 두 차례에 걸쳐 총 350∼400대의 폭격기를 동원해 런던을 공습했다. 영국 공군도 가용한 항공기를 모두 출격시켜 맞대응에 나섰다. 영국 전투기의 날렵한 기동에 독일 폭격기들의 대형은 흐트러졌고 별다른 전공을 세우지 못했다. 하루 동안 영국은 군용기 26대를 잃은 반면 격추된 독일 군용기는 60대에 달했다. 숫자의 차이보다 중요한 것은 장병들의 사기였다. ‘영국 공군은 곧 무너질 것’이라던 독일 공군의 믿음은 더는 지속되기 어려웠다. 사력을 다했는데도 영국 공군은 여전히 살아남아 철벽 같은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영국인들로선 알 수 없었던 사실이지만 그로부터 불과 이틀 뒤인 1940년 9월17일 히틀러는 영국 상륙작전의 무기한 연기를 명령했다. 제공권을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독일 함대를 출동시켜봐야 커다란 희생만 따를 뿐이란 계산에 따른 조치였다.
2차대전이 아직 진행 중이던 1943년 영국 국왕 조지 6세(엘리자베스 2세의 부친)는 9월15일을 ‘영국 전투의 날’로 지정해 공군 조종사들의 노고와 희생을 기리도록 했다. 15일 제84주년 영국 전투의 날을 맞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선 키어 스타머 총리, 공군 지휘부, 2차대전
15일(현지시간) 제84주년 ‘영국 전투의 날’을 맞아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석한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왼쪽)가 리처드 나이튼 공군참모총장과 악수하고 있다. 영국 공군 홈페이지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참전용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기념식이 열렸다. 영국 전투는 1939년 9월1일 2차대전 개전 이후 줄곧 승승장구하던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처음 겪은 좌절이었다. 물론 그것은 영국이 유럽 대륙과 바다로 격리된 섬나라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본질적으로 방어전 성격이 짙은 영국 전투에서 영국이 이겼다고 해서 그것이 곧 나치 독일의 패퇴로 이어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영국 국민의 사기 그리고 미국 등 아직 2차대전에 참전하지 않은 국가들의 정세 판단에 끼친 영향은 대단했다. 그 시기 나치 독일과 교전 중인 나라는 주요국 가운데 영국이 유일했다. 영국 홀로 자유 진영의 운명을 등에 짊어지고 치열하게 싸웠던 영국 전투 기간을 오늘날 영국인들이 “가장 좋았던 시절”(The Finest Hour)로 기억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김태훈 논설위원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