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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9 (목)

보수 진보 넘나든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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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광주민주화운동’
근로자의 날 ‘3월10일’→‘5월1일’ 바꾸기도


매일경제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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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화국 핵심 정치인으로 활동하면서도 진보(혁신)와 교류에 애쓴 남재희(南載熙) 전 노동부 장관이 15일 오전 8시10분께 서울 한 병원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16일 전했다. 향년 90세.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청주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원래 서울대 의대에 들어갔다가 중퇴하고 법대에 들어갔다. 서울대 재학 당시 이승만(1875∼1965) 대통령의 양아들 이강석(1937∼1960)군이 서울대 법학과에 부정 편입학하자 반대 시위를 주도했다. 학생운동 경력 탓에 공직을 단념하고 1958년 한국일보 기자로 언론계에 투신, 민국일보를 거쳐 1962∼1972년 조선일보 기자와 정치부장, 편집부국장, 1972년 서울신문 편집국장, 1977년 서울신문 주필을 지냈다. 관훈클럽 총무를 맡기도 했다.

1979년 민주공화당 후보로 서울 강서구에서 제10대 국회의원이 된 것을 시작으로 13대까지 강서구에서 4선을 역임했다. 1980년 민주정의당 창당에 참여, 민정당 정책위의장을 두번 역임하는 등 전두환 정권의 핵심 정치인으로 활약했다.

노태우 정권 인수위에서 ‘5·18 광주사태’ 명칭 변경이 논의됐을 때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제안해 관철시켰다. 당시 야당은 ‘5·18 광주민주화투쟁’이라는 용어를 주장했다.

김영삼(1927∼2015) 대통령 때인 1993∼1994년 노동부 장관을 지냈다. 이때 노동계의 요구를 받아들여 기존 ‘근로자의 날’(3월10일)을 5월1일로 바꿨다. 당시 노동부 안은 명칭도 ‘노동절’로 바꾸자는 것이었지만, 보수 진영의 반발을 고려해 명칭은 ‘근로자의 날’을 쓰기로 했다. 이후 5년간 호남대 객원교수로 정치 문제를 강의했다.

스스로 자신을 ‘체제 내 리버럴’이라고 표현했고, 유족에 따르면 고은 시인은 ‘의식은 야(野)에 있으나 현실은 여(與)에 있었다/ 꿈은 진보에 있으나/ 체질은 보수에 있었다’고 쓴 적도 있다. 노동부 장관 재직 시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게 현대중공업의 파업 현장에 공권력을 투입하지 말라고 건의하기도 했다. 1996년 정계 은퇴 후에는 국내 혁신 세력에 관한 책을 쓰는 등 친(親)진보 활동을 했다. 문재인 정권 국정기획자문위원회에 참여해 속도 조절을 주문했다.

고인은 ‘스튜던트 파우어’(공저, 1969), ‘양파와 연꽃:체제내 리버럴의 기록’(1992), ‘언론 정치 풍속사-나의 문주(文酒) 40년’(2004), ‘문제는 리더다:정관용이 묻고 남재희, 김종인, 윤여준, 이해찬이 답하다’(공저, 2010), ‘아주 사적인 정치 비망록’(2006), ‘진보 열전-남재희의 진보인사 교유록 오십년’(2016), ‘시대의 조정자: 보수와 혁신의 경계를 가로지른 한 지식인의 기록’(2023), ‘내가 뭣을 안다고: 잊혀간 정계와 사회문화의 이면사’(2024) 등 다수의 저서를 냈고, 새마을훈장 근면장과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 딸 남영숙 이화여대 교수는 “아버지는 보수와 혁신을 넘나든 정치인이었고, 그 점을 스스로도 자랑스러워하셨다”고 말했다.

유족은 부인 변문규씨와 4녀(남화숙<미국 워싱턴주립대 명예교수>·남영숙·남관숙·남상숙)와 사위 예종영(전 가톨릭대 교수)·김동석(KDI 국제정치대학원 교수)씨 등이 있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3호실, 발인 19일 오전 5시20분, 장지 청주시 미원 선영. ☎ 02-2227-7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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