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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3 (월)

[시선2035] 그러려니 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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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김정민 사회부 기자


‘오늘 나는 무슨 일이 생겨도 그러려니 한다.’

나는 이걸 ‘그러려니 매직’이라고 부른다. 외부의 어떤 자극에도 극한의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한 나만의 마법 주문이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속으로 그러려니, 그러려니, 그러려니 삼창하면 자기최면 모드에 돌입한다. 제대로 들어갔다면 10분 뒤에 운석이 충돌한다는 뉴스를 봐도 차분히 ‘음, 지구가 멸망하는 군’ 할 수 있다. 나름 비장의 무기 같은 거라서 직접 써본 건 살면서 두 번이다. 한 번은 수능날, 한 번은 지금 다니는 회사의 최종 면접날이다.

갑자기 나의 작고 내밀한 비기를 공개하는 건 다름 아닌 추석 연휴가 지났기 때문이다. 추석이란 게 사실 직장인한테나 연휴지, 수험생과 취준생에겐 그저 성큼 다가온 결전일이나 알리는 몹쓸 타이머 아니던가. 수능이 50일쯤 남았다는 알림, 하반기 공채가 밀려든다는 알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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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대학에 신입사원 채용 배너가 놓여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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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0년도 전이지만 수능의 기억은 생생하다. 나는 그날 엄마가 정성스레 싸준 도시락을 아빠 차에 두고 내렸다. 비장하게 자리를 잡고 가방 지퍼를 좌악 열었는데 도시락이 없었다. 하지만 시험 전날부터 ‘영어 듣기평가 때 전투기 12대가 굉음을 내며 지나가도 그러려니 한다’는 수준급 최면을 걸어둔 덕에 감상은 ‘음, 도시락이 없군’이 끝이었다. 다행히 정문에서 받은 사탕과 초콜릿을 근근이 섭취하며 마지막 교시까지 무사히 마쳤다.

물론 집에 가니 부모님은 온종일 ‘얘가 밥 안 먹고 어쩌나’ 마음 졸이셨다고 했다. 엄마는 평생 할 자식 밥걱정의 2할 정도를 그날 다 써버린 사람처럼 파리한 안색으로 나의 ‘그러려니’ 무용담을 어처구니없다는 듯 들어줬다. 어쨌건 다행이라며.

취업의 마지막 관문이었던 임원 면접 때는 미처 예상 못 한 질문을 받았다. “다른 회사를 하나 골라 갈 수 있다면 어디를 가겠냐”는, 면접관 입장에선 지원자의 로열티와 시장의 경쟁사를 한 방에 파악할 수 있는 상당히 뻔한 질문이었는데 준비를 못 했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내가 이걸 왜 놓쳤지, 그런 자책도 잠시 앞차례 지원자들의 답변이 빠르게 끝나갔다.

‘그러려니 해, 길에서 마주치면 그냥 지나가는 아저씨들이야(당시 면접관 중 여성이 없었다).’ 주문을 외고 마음을 가라앉히니 해답이 보였다. 직접적인 경쟁사는 아니지만, 평소 관심사를 보여줄 수 있는 동종업계 회사로 적절히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두고 온 도시락도, 준비 못 한 문답도 귀엽고 사소한 일화다. 그건 필시 내가 그 길을 이미 지나와서일 것이다. 당장 길을 지나던 때엔 분명 개미만한 변수도 코끼리만 하게 보였고, 뭔가에 당황하지 않고 평정심을 되찾는다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없는 시간을 내서 여기까지 읽어준 수험생, 취준생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긴장되는 그 날, 꽤 효험이 있으니 ‘오늘 나는 무슨 일이 생겨도 그러려니’ 해보시라고.

김정민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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