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선(오른쪽) 씨가 지난 3월 주한 레바논 대사관에서 앙투안 아잠 대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 강형원 포토저널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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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89세로 별세한 고(故) 박동선 파킹턴코퍼레이션 회장에 대한 정주진 21세기 전략연구원 이사장의 평가다. 국가정보원에서 30년 넘게 근무한 정 이사장은 1970년대 미국 워싱턴과 한국 정가를 떠들썩하게 한 ‘코리아 게이트’ 사건을 연구해 왔다. 정 이사장은 “박 회장은 1970년대 미 의회 네트워크가 미약하던 시절 한국 민간 외교를 사실상 개척한 인물”이라며 “당시 워싱턴 시각에선 로비스트지만 서울 시각에선 국가 최대의 안보 위기 상황에서 한국을 구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한·미 외교 관계에 큰 마찰을 일으킨 코리아 게이트 사건의 주역인 박 회장이 숨을 거두면서 그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고 있다. 해당 사건으로 인해 로비스트라는 딱지가 붙었지만, 그가 보여준 민간 외교력은 불확실한 국제정세에 처한 현재 한국에도 필요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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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타운대 첫 아시아 학생회장
박 회장은 대미 네트워크가 사실상 불모 상태였던 1960년대에 한국인으로 미 정계 인사들과 긴밀한 교류를 벌인 인물이다. 1935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나 1947년 월남한 그는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뒤 1955년 미 조지타운대에 입학했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재학 중 아시아인 최초 학생회장을 맡았다. 졸업 후 미국에서 미국산 쌀을 한국으로 수입하는 사업을 벌였다. 1966년엔 워싱턴에 학맥을 기반으로 한 사교 클럽 ‘조지타운 클럽’을 만들고 미 의원을 비롯한 정계 주요 인사들과 두터운 인맥을 쌓는다.
1970년대 코리아 게이트와 관련해 미국 언론에 보도된 박동선 회장 관련 기사들.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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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박 회장은 ‘제2의 고향’으로까지 생각했던 미국과 두 번의 악연을 맺는다. 첫 번째는 1976년 10월 워싱턴포스트(WP) 보도로 시작된 코리아 게이트 사건이다. WP는 당시 “한국인 박동선이 한국 중앙정보부 지시에 따라 연 50만∼100만 달러의 현금을 미 의원과 공직자에 주는 매수 공작을 벌였다”고 보도했다. 박 회장은 1978년 신분보장을 약속받고 출석한 미 의회 청문회에서 미 전·현직 의원에 85만 달러의 자금을 건넨 사실을 인정했다. 사건은 현직 의원 1명이 유죄판결을 받고 7명이 의회 징계를 받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후 자유로운 신분으로 국제무대에서 비즈니스를 벌이던 박 회장은 2005년 미국 당국에 체포돼 약 3년간 옥살이를 한다. 이라크 정부로부터 최소 200만 달러를 받고 유엔 석유 식량 교환(oil-for-food)’ 프로그램 채택을 위한 불법 로비를 벌인 혐의다. 두 사건으로 인해 박 회장에겐 ‘독재정권 하수인’ ‘뇌물 브로커’란 오명(汚名)이 꼬리표처럼 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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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물 브로커’ 오명에도…“美정계 당당한 몇 안되는 한국인”
지난 20일 오전 서울 용산구 한남동 순천향대학교 부속 서울병원 장례식장에 1970년대 말 '코리아 게이트'의 주역인 재미 한국인 사업가 고(故) 박동선 씨의 빈소가 마련되어 있다.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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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박 회장과 교류한 국내 주요 인사들의 평가는 사뭇 다르다. 코리아 게이트 당시 주미 한국 대사관 의회 담당 참사관이었던 김석규 전 주일대사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당시 청문회장에서 한 미측 의원이 박씨에게 ‘당신은 이전에 쌀 거래를 해본 경험이 있느냐’고 몰아붙이자 박씨가 ‘당신은 이전에도 국회의원 해본 적 있느냐’고 되받아쳤다”며 “미국의 군사 원조 한 푼이 아쉽던 그 시절 박씨의 모습을 보며 대단한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종찬 광복회장(전 국정원장)은 “박 회장은 한국 정체성과 이익을 대변하면서 미 정계 인사들에게 주눅 들지 않고 자기 생각을 당당히 말하는 몇 안 되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2008년 미국에서 석방돼 귀국한 후에도 미 정계와 긴밀한 네트워크를 유지하며 한국의 정치·외교 인사들에게 지속적인 조언을 해준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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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납북 협상과정 비밀리에 역할도
활동 범위가 미국에 국한된 것도 아니었다. 오랫동안 박 회장과 교류를 해 온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은 “박 회장의 네트워크를 높게 평가한 일본·대만 정부도 함께 일하고 싶어했다”고 말했다. 실제 지난 2018년 일본 주간지 슈칸분슌(週刊文春)은 2017년 한국 정치인들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관저 면담을 성사시킨 배후에 박 회장이 있다고 보도했다. 슈칸분슌은 박 회장을 70년대 한미관계를 흔든 코리아 게이트의 중심인물이라고 소개하면서 “아베 총리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 전 외무장관과 매우 친했던 그는 일본 정계에도 깊게 관여했다”며 “일본인 납치 문제와 관련된 일본 정부와 북한과의 협상 과정에서도 박씨가 비밀리에 활동했다”고 전했다.
박동선(왼쪽) 씨가 지난 3월 주한 레바논 대사관에서 앙투안 아잠 대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 강형원 포토저널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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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엔 중동과 아프리카·중남미 국가들을 대상으로 활발한 민간외교를 벌여왔다. 김종규 이사장은 “박 회장은 미국에 유학 온 아랍 왕자들과 교유한 친분을 수십년간 유지해 온 사람”이라고 말했다. 별세 직전까지도 멕시코 정부와 총 3조원 규모의 복합화력발전소(LNG) 건립 사업을 추진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20일 박 회장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순천향대병원 장례식장에도 이들 국가 대사관에서 보낸 조화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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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도 관심, 박수근에 집 한 채값 후원
박 회장은 문화·예술에도 관심이 깊었다. 1963년 국민화가 박수근 화백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자 당시로선 집 한 채 값인 25만환을 후원한 사실도 지난 2022년 알려졌다. 한국 전통 차(茶)에 큰 관심을 갖고 생전까지 차(茶)인연합회 이사장을 맡았다. 김종규 이사장은 “박 회장은 기독교 신자임에도 미국에서 수감 중에 불교 경전 법구경 찾을 정도로 종교에 깊은 관심이 있었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지난 2014년 중앙선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코리아 게이트는 미국 원조를 못 받으면 국가를 유지하지 못할 것 같은 나라를 위해 내가 벌인 자발적 활동”이라며 “지금도 우리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수주받아야 살 수 있는 나라”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한국엔 우수한 관리가 많지만, 발등에 불 떨어져야 서두르는 측면이 있다. 은밀한 협상을 벌일 때 민간 차원의 외교가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종찬 회장은 “국정원의 안일함으로 벌어진 한국계 미국인 수미 테리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 기소 사건 등을 보면 아직도 박 회장과 코리아 게이트 사건에서 한국이 교훈을 얻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승호·이유정 기자 wonder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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