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다] 쩡롄쑹 (1917~1999)
1949년 9월27일, 중국의 새 국기 오성홍기가 채택되었다. 깃발을 디자인한 쩡롄쑹은 앞으로 자기가 만날 파란만장한 운명을 몰랐으리라.
쩡롄쑹은 부유하지는 않지만 지식인 출신이었다. 학생 시절부터 좌파 사상에 동조했다. 졸업 뒤 신분을 감추고 공산당 지하 요원으로 일했다. 오랜 내전 끝에 우파 국민당 정부가 쫓겨나고 공산당 정부가 들어서자 뿌듯했을 것이다.
1949년 7월, 중국의 새 정부는 새 국기 디자인을 공모했다. 쩡롄쑹은 열흘 넘게 깃발을 구상했다. 버려진 도면이 한 무더기였다고 한다. 쩡롄쑹은 큰 별(당)과 작은 별(인민)을 그렸다. 별의 노란색은 중국 사람의 피부색을 나타낸다고 했다. 처음에는 다섯 별을 국기 가운데 두었다가 나중에 왼쪽 위로 옮겼다. 전보다 세련된 디자인이 됐다.
쩡롄쑹의 디자인이 채택되었다. 나중에 중국 정부는 큰 별은 당이고 작은 별 넷은 각각 노동 계급, 농민 계급, 소자산 계급, 민족 자산 계급이라고 설명.
그런데 1957년 ‘반우파 운동’ 때 쩡롄쑹은 블랙리스트에 오른다. 평소 들고 다니던 찻잔에 “멋진 말을 적게 하고 실제로 더 많은 일을 하라”는 러시아 혁명가 레닌의 말이 적혀 있었는데, 이것이 주변 사람의 눈에 고깝게 보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1966년 ‘문화 혁명’이 터지고 쩡롄쑹은 홍위병의 공격을 받는다. 찻잔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또는 노동자나 농민이 아닌 지식인 출신이라서 표적이 되었을 수도 있다. 또는 그저 운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쩡롄쑹은 ‘반역자’로 몰렸다. ‘지주 부르주아의 충실한 자손’이라 불렸다. 당에서 쫓겨나고 가택 수색을 당했고 끌려가 노동 개조를 받았다. 시련의 시간. 이 기간 동안 오성홍기를 마주칠 때마다 쩡롄쑹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입밖에 자기 마음을 털어놓지 못했을 것이다.
1985년 11월이 되어서야 당에 다시 가입할 수 있었다. 예순여덟의 나이였다. 말년에는 학교와 부대를 다니며 자신의 삶을 중국 젊은이들에게 증언하였다. 1999년에 여든둘의 나이로 숨졌다.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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