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본회의장이 26일 난장(亂場)이 됐다. 여야가 합의해 각각 1명씩 국가인권위 인권위원을 추천했지만, 야당 추천 후보자는 통과한 반면 여당 추천 후보자는 부결됐기 때문이다. 합의가 깨진 본회의장에서 여당 의원들은 민주당을 향해 연신 “사기꾼”이라고 외쳤고, 이에 야당은 “윤석열 사기꾼”이라고 맞받았다. 중간중간 개별 의원의 말싸움이 한데 뒤섞이면서, ‘민의의 전당’이라 불리던 본회의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됐다.
26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여당 추천 몫인 한석훈 국가인권위원 선출안이 부결되자 국민의힘 추경호 원내대표(왼쪽)와 더불어민주당 박찬대 원내대표가 대화한 뒤 다시 회의장으로 들어오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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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뒤 평온했던 본회의장은 첫 안건인 두 인권위원 선출안 투표 결과가 공개되며 들썩이기 시작했다. 먼저 민주당 추천 인사인 이숙진 전 여성가족부 차관은 재석 298명에 찬성 281표, 반대 14표, 기권 3표로 가결됐다. 하지만 이어 발표된 여당 추천 인사인 한석훈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찬성 119표, 반대 173표, 기권 6표로 부결됐다. 통상적으로 국회 추천 몫 인사는 여야 합의를 거쳐 본회의 안건으로 올리는 게 관례다. 게다가 한 교수는 3년 전 본회의에선 다수 여야 의원의 찬성을 받았던 현직 인권위 상임위원이다.
표결 결과가 공개되자 국민의힘은 “민주당이 합의를 깼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단상 앞으로 뛰쳐나간 여야 원내대표도 험한 말을 주고받았다.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는 “(인권위원 찬반을) 당론으로 정하지 않았고, ‘부적절한 인사’란 한 의원의 의총 발언을 들은 뒤 개별 의원들이 자유 투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의총 결과에 대한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지 않았냐”고 맞받았다. 양측의 고성이 오가자 우원식 국회의장은 “(원내대표끼리) 서로 해결하고 오시라”며 정회를 선포했다.
33분 뒤 속개된 본회의에선 여야 간 쌓인 감정이 여과 없이 표출됐다. 의사진행발언에 나선 배준영 국민의힘 원내수석은 “본회의장에서 제가 사기를 당할 줄은 몰랐다”며 “민주당이 70년간 쌓아온 대화와 타협의 정신이 사라졌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민주당과) 지난 이틀에 걸쳐 오늘 본회의 의사일정을 상세하게 협의했고, 두 인권위원도 양당이 선출하는 것으로 합의했다”며 “단 한 가지의 약속도 지킬 수 없는데 우리가 국회에서 공존할 수 있겠느냐. 민주당의 각성을 촉구한다”고 덧붙였다.
이어 연단에 오른 박성준 민주당 원내수석은 “누가 사기를 당했느냐. 사기당한 건 국민 아니냐”며 “윤석열 정권에 온 국민이 지금 분노하고 있고, 이런 정권은 처음 본다”고 맞받았다. 이어 “의총에서 서미화 의원이 인권위의 실태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도저히 한 후보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의원들의 자의적 판단 아니었겠느냐”고 했다. 여당 의원들이 “사기꾼”을 연호하자, 박 수석은 웃으며 “그렇게 하세요, 그렇게 하세요”라고 대꾸했다.
26일 국회 본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방송 4법 등 재의가 부결된 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규탄 대회를 위해 본회의장을 퇴장하자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와 의원들이 우원식 국회의장에게 항의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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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부결에 대한 여야 해석은 정반대였다. 민주당은 본회의 직전 열린 의총에서 한 교수와 함께 인권위원을 지낸 서미화 의원의 발언에 의원들의 마음이 움직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 의원은 의총에서 “(여권이) 얼마 전 공안 검사 출신 안창호 위원장을 지명하는 것도 모자라 한석훈 후보까지 윤석열 정권에 군림하는 호위무사를 보내 인권위를 지금보다 더 망가뜨릴 작정”이라고 말했다.
반면 국민의힘은 반대 173표가 민주당 의석수(170석)와 유사한 점을 언급하며 “의도된 기습 뒤통수”(원내 관계자)란 반응을 보였다. 한 교수는 지난 6월 한 일간지에 기고한 ‘李 수사 검사 탄핵소추는 사법 침해’란 글을 통해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을 비판한 적이 있다. 추 원내대표는 “이재명을 향한 꼴사나운 충성 경쟁”이라며 “사기극에 대해 민주당은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했다.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민주당은 당리당략을 위한 ‘쳇바퀴 정쟁’을 중단하고 민생법안 처리에 집중하길 바란다”고 했다.
한바탕 난리 뒤엔 이른바 방송 4법과 전 국민 25만원 지원법, 노란봉투법 등 윤석열 대통령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한 6개 법안의 재표결이 진행됐다. 모두 의결 정족수인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을 얻지 못하고 자동 폐기됐다. 그러자 야당 의원들은 정회가 선포되지 않았는데도 규탄대회를 연다며 본회의장을 이탈했다. 이에 “정상적으로 진행하라”는 국민의힘 의원들과 “기다리라”는 우원식 의장이 입씨름이 또다시 벌어졌다. 로텐더홀에 모인 국민의힘 의원들은 규탄대회를 열어 “양심 없는 합의파기 사기 정치 규탄한다”고 소리쳤다. 반면 민주당과 조국혁신당 등은 로텐더홀 계단에 모여 “민생 외면, 국민 무시, 국민의힘 각성하라”고 외쳤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6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와 대화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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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는 이후 ‘딥페이크 범죄 방지법’, ‘공매도 개선법’, ‘임금체불 방지법’ 등 77건의 민생법안을 순서대로 통과시켰다. 딥페이크 범죄 방지법은 딥페이크 성착취물 등을 소지·구입·저장·시청할 경우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도록 한다. 전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의결 때 논란이 된 14조 2항의 ‘알면서’ 문구는 최종 삭제됐다. 딥페이크 성착취물이라는 것을 모르고 영상을 시청했다 처벌 받는 가능성을 차단해야한다는 취지였지만, 범죄를 빠져나갈 구멍이 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야권은 본회의 시작에 앞서 “영상물 시청한 사람이 몰랐다고 주장하면서 부당하게 처벌을 피할 수 있다”며 해당 문구를 삭제한 수정안을 제출해 의결했다. 딥페이크 성범죄 위험이 “과대평가 됐다”고 지적한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은 표결에 불참했다.
임산부 출산 휴가 확대,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제도 확대, 맞벌이 부부 육아휴직 기간 확대 등을 골자로 하는 ‘모성보호3법’도 통과됐다. 자녀당 육아휴직 기간을 부부 합산 2년에서 3년으로 늘리고 배우자 출산휴가를 10일에서 20일로 확대된다. 국가가 한부모가족에게 양육비를 먼저 지급한 뒤 비양육자로부터 나중에 받아내는 양육비이행법 개정안도 국회 문턱을 넘었다.
야권은 이날 폐기된 법안들을 일부 보완·수정해 재발의할 예정이다. 윤종군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국회가 의결한 법을 거부권을 행사하고 폐기하는 것이 반복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면서도 “대통령이 거부권을 남발한다 해서, 폐기 수순을 밟는다고 해서 야당이 해야 할 역할을 포기할 수 없기에 관련된 입법 취지를 담은 입법 활동은 계속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기정·성지원 기자 kim.ki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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