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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러시아 찬 공기를 술로 빚은 듯… 투명하게 빛나는 보드카 ‘벨루가’ [박병진의 광화문 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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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다리 전경. 박병진 칼럼니스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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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다시 갈 수 없게 된 도시가 하나 있다. 한때 가장 가까운 유럽이라고 해서 색다른 주말여행지로 꽤 각광을 받던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는 보드카의 나라를 한번 가고싶어 오래전 늦가을에 항공권을 예약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그 결정이 요즘 가기 어려운 블라디보스토크를 체험해본 신의 한 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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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는 한때 많은 항공사가 취항했지만 이제는 러시아 국내선과 베이징, 평양, 타슈켄트 정도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내게는 그때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의 입국심사가 큰 문화적 충격이었다. 한참 위에서 내려다보는 입국심사관의 자리는 모든 입국자가 입국심사관을 우러러보며 자신들이 왜 이곳에 왔는지를 장황히 설명을 해야 하니, 마치 제국의 황제를 알현한 약소국의 신민이라도 된 것 같아 씁쓸했다. 게다가 한참을 기다려 심사 차례가 됐는데 그 높은 곳에 있는 입국심사관이 자신의 휴식 시간이라고 내 눈앞에서 창구 셔터를 주르륵 내리고 사라진 것은 더 큰 충격이었다. 결국 다시 줄을 서야만 했다. 시베리아횡단철도의 종착지로도 유명한 블라디보스토크란 이름은 ‘지배하다’라는 ‘블라디’와 ‘동방’이란 ‘보스토크’를 합친 말이다. 부동항을 찾아 세상의 동쪽 끝으로 와야 했던 제정러시아의 절박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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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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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진 칼럼니스트


늦가을의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비록 부동항이라지만 그 바닷물은 얼음장같이 차가웠고 강풍이 몰아치는 동해의 북쪽 끝자락은 내게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이곳은 우리 선조들의 옛 땅이면서 또한 망국의 설움을 안은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의 비원의 땅이기도 했다. 유명한 할리우드 배우인 율 브리너의 생가를 지나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돼준 한인촌인 ‘신한촌’ 옛터로 가 보니 선조들의 흔적은 다 사라지고 기념탑만이 덩그러니 서 있다. 최근 뉴스를 보니 이곳도 방치된 채 흉물이 돼 가고 있어 가슴이 답답하다. 신한촌 참변으로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조선인들, 자유시 참변으로 볼셰비키에 학살당한 독립군 모두 양쪽 어디에도 의지할 곳 없었던 망국의 슬픈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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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에 진열돼 있는 보드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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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촌을 나오니 인근에 꽤 큰 슈퍼마켓이 있어서 구경삼아 들어갔다. 처음 보는 말린 생선부터 다양한 러시아 식재료를 파는 곳인데 그 안의 어마어마한 보드카 진열대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그렇다. 여기는 보드카의 나라가 아닌가! 슈퍼마켓의 식재료보다 보드카의 진열대가 더 큰 그들의 보드카 사랑엔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 수많은 보드카 중에서 가장 비싼 것은 ‘벨루가’인데 진열대의 가장 좋은 자리에 넘치도록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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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루가 보드카


벨루가는 러시아어로 ‘희다’는 뜻이니 반복해서 여러 차례 증류해 맑고 투명한 색과 맛을 내는 보드카의 이름으로는 제격이다. 벨루가는 숯과 은으로 여러 번 거르고 최대 90일까지 숙성해 다른 보드카보다 가격은 몇 배 비싸지만 비누 냄새가 나는 듯한 저가 보드카와는 확실히 다른 우아한 향과 산뜻한 뒷맛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이 보드카 병에는 또 다른 러시아의 특산물인 ‘벨루가 철갑상어’가 멋지게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이 벨루가 철갑상어에서 바로 최고급 캐비어인 ‘벨루가’가 나온다. 벨루가 철갑상어가 다른 철갑상어보다 희다고 해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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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브리너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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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블라디보스토크 여행 내내 밤마다 이 벨루가 보드카를 즐겨 마셨는데 가격은 명성에 비해서는 그리 비싸지 않다. 맑고 깨끗해 숙취도 없고 향긋하고 맛있기까지 한 보드카를 누가 마다할 수 있을까? 그래서 보드카 한 잔과 함께 조금 다른 벨루가를 상상해봤다.

프랑스 툴루즈에는 에어버스의 최종 조립라인이 있다. 물론 도색 등 마무리는 출고지인 독일 함부르크에서 하지만 비행기의 형태가 완성되는 곳은 이곳이다. 에어버스가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조립했던 기종이 있다. 이제는 단종이 된 A380인데 너무나 커서 운반이 힘들기에 최대한 가까운 공장에서 생산된 동체 모듈과 부품을 모아 이곳에서 조립생산을 했다. 바로 이 A380의 동체와 날개를 수송하기 위한 전용 수송기가 전 세계에 6대 있다는 벨루가이다.

벨루가는 북극해에 살고 있는 크고 아름다운 흰돌고래로 이 항공기와 외양이 유사한데 에어버스는 항공기의 전면에 흰돌고래의 얼굴을 그려 넣어 더욱 친근하고 귀여운 인상을 만들었다. 이 벨루가는 돌고래의 입 부분에 칵핏이 위치해 유난히 큰 짱구 이마가 위로 열리며 화물을 싣는 구조이다. 원래는 ‘벨루가ST’가 있었으나 A380 생산 덕분에 더 커진 ‘벨루가XL’이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 팬데믹 종료 이후 급증하는 항공 수요로 각 항공사는 퇴역시킨 A380을 다시 띄우고 있어 단종된 A380이 살아난다면 벨루가의 역할도 커질 것이다.

이렇게 많은 벨루가가 존재하지만 내가 지금 누릴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벨루가는 보드카뿐이다. 나는 캐비어를 좋아하는 것도, 돌고래를 보러 북극해까지 갈 것도 아니다. 더욱이 벨루가 수송기는 내가 탈 일이 아예 없으니 보드카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셈이다. 물론 내게는 행복한 선택이다.

부디 맑고 투명한 보드카를 마시고 모두가 맑아진 머리로 보드카의 나라들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보드카의 이름으로도, 캐비아의 이름으로도, 가장 큰 수송기의 이름으로도 모든 곳에서 최고의 자리에 있는 벨루가를 예찬하며 이 모든 것이 지금도 북극해에서 자유롭게 뛰어놀고 있을 벨루가라는 이름에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박병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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