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가수 김용만 별세. 사진 I 연합뉴스 |
1950∼60년대를 풍미한 원로가수이자 작곡가 김용만이 별세했다. 향년 89세.
이날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에 따르면 김용만은 이날 오전 9시 30분쯤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고인은 지난 1933년 국악인 김대근 선생의 3남으로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고인의 동생인 김용남 역시 대금 연주와 악기 제작을 한 국악인이었다.
고인은 악기점에서 일하는 친구 때문에 그곳을 드나들며 ‘개나리 처녀’의 작곡가 김화영을 만났고, 이를 계기로 ‘남원의 애수’를 녹음하고 이 곡으로 1953년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고인은 1953년 데뷔곡 ‘남원의 애수’로 큰 사랑을 받아 그 성공에 힘입어 신신레코드사 전속가수로 발탁됐다. 이후 ‘효녀 심청’·‘청춘의 꿈’·‘삼등인생’·‘생일 없는 소년’ 등을 잇따라 히트시키며 인기 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점차 우리 가락을 접목한 민요와 만요(漫謠·희극적인 풍자곡) 등으로 음악의 스펙트럼을 넓혀갔다. 이 때문에 그는 무대에서 ‘민요 가수’ 혹은 ‘만요 가수’로 종종 소개됐다.
또한 가수 백야성과 콤비를 이뤄 그의 대표곡을 여럿 만드는 등 작곡가로도 활약했다. 히트곡 ‘잘 있거라 부산항’을 비롯해 ‘항구의 영번지’, ‘못난 내 청춘’, ‘마도로스 도돔바’ 같은 백야성의 노래가 모두 김용만의 작품이다. 두 사람은 듀엣으로 ‘김군 백군’도 발표하기도 했다.
고인은 이처럼 가수와 작곡가를 오가며 음악 활동을 활발히 했으며, 지난해와 올해 KBS1 음악프로그램 ‘가요무대’ 등에 출연해 관객과 시청자를 만났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 순천향대학교 서울병원 장례식장 특7호에 마련됐다. 발인은 오는 29일 오전 8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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