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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게니자 문서와 난파선…남양사 연구 넓혀준 '의외의 자료들' [김기협의 남양사(南洋史)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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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역사학자


유대교 시나고그(회당)에는 다락이나 지하실 등 한적한 위치에 설치되는 ‘게니자(genizah)’란 공간이 있다. 신도들은 종이쪽지 하나라도 신의 이름이 적힌 것은 다른 곳이 아니라 이곳에 버려야 한다. 신성모독을 피하기 위해서다. 종교와 관계없는 계약서나 편지도 관용적으로 쓴 신의 이름 때문에(“주님의 도우심 덕분으로~”) 게니자에 들어간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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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르칸드 시나고그의 게니자(1870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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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실용적 형태의 게니자도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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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같은 유기물질은 오래 방치하면 썩어 없어진다. 그런데 카이로처럼 건조한 곳의 게니자에서는 1천년 이상 보관되기도 했다. 벤에즈라 시나고그 등 카이로 몇 곳에서 나온 약 40만 점의 고문서를 ‘카이로 게니자’라 한다.

카이로 게니자 문서는 19세기 말 반출이 시작되어 영국과 미국 등 여러 연구기관에 분산되어 있다. 그 연구 가치가 갈수록 크게 인식되면서 통합 연구를 위한 사이버 기술의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하나의 문서가 여러 기관에 몇 쪽씩 나뉘어 있는 것도 있다.) 그에 따라 연구도 계속 확대-심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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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니자문서 연구의 개척자 솔로몬 셱터(1847-1915)가 1898년경 케임브리지에 가져온 카이로 게니자 문서를 살펴보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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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니자문서가 밝혀준 한 12세기 상인의 삶



카이로 게니자 문서의 내용을 지역별로 보면 지중해 일대가 압도적인데, 인도양 일대의 내용도 꽤 있다. 1130-40년대에 인도 서남해안(말라바르)의 망갈로레에 거주하면서 활동한 유대인 상인 아브라함 벤 이주가 작성한 수십 건 문서가 확인되어 주목을 끌었다.

벤 이주를 처음으로 부각시킨 책은 아미타브 고시의 〈오래된 곳에서 In an Antique Land〉(1992)였다. 소설 같지만 넌픽션으로 분류된다는 이 책을 아직 읽지 못했는데, (이 작업에 직접 참고가 되지 않더라도) 꼭 읽을 책으로 벼르고 있다. 인류학 등 연구-인식 방법에 관해 흥미로운 문제 제기가 담겨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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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itav Gosh, In an Antique Land (1992)


스튜어트 고든은 〈아시아가 곧 세계였던 시대 When Asia was the World〉(2008)의 한 챕터에 벤 이주를 소개했다.(마환의 정화 함대 기록을 다룬 또 하나 챕터를 소개한 바 있다.) 이 챕터에는 벤 이주의 경력과 면모가 상당히 소상하게 밝혀져 있다.

튀니지의 마디아에서 1100년경 랍비의 아들로 태어난 벤 이주는 카이로를 거쳐 아덴(홍해 입구)에서 마드문 이븐 반달이란 (게니자문서 외의 자료로도 존재가 확인되는) 큰 상인 아래 일하다가 그 권유에 따라 1132년경 망갈로레에 자리 잡았다. 그곳에 도착한 직후 아슈란 이름의 노예를 해방시키고 그와 결혼해 자녀를 두었다. 1149년경 망갈로레를 떠나 아덴으로 돌아와 예멘에서 사업을 계속했다.

카이로 게니자에서 나온 수십 통 편지로 확인되는 벤 이주의 경력이다. 12세기 중엽이라면 한국에서는 고려 중기다. 그 시대 한 평민 상인의 삶을 카이로 게니자문서의 아주 작은 한 부분에서 이만큼 명료하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다.



재활용한 종이 한 장을 연구한 책



아브라함 벤 이주를 전적으로 다룬 책도 나왔다. 엘리자베스 램번의 〈아브라함의 화물 목록 Abraham’s Luggage: A Social Life of Things in the Medieval Indian Ocean World〉 (2018). 수십 건의 ‘벤 이주 문서’ 중 재활용한 종이 한 장에 집중한 연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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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izabeth Lambourn, Abraham’s Luggage: A Social Life of Things in the Medieval Indian Ocean World (2018)


필요 없게 된 편지의 뒷면을 채우고 앞면으로 넘어와 빈틈을 채운 내용은 잡다한 물건 목록이다. 아무 서사 없이 물건 이름과 수량만 적혀 있다. 벤 이주가 쓴 것이란 사실은 그가 쓴 다른 편지의 필적과 비교로 알아본다.

목록 내용으로 보아 항해에 나선 승객의 화물이다. 창고에 넣을 상품이 아니라 승객이 신변에 둘, 말하자면 수화물이다. 여러 가지 식품, 취사도구와 함께 간이침대 등 침구가 있고 문짝도 있는 것을 보면 승객(과 그 수행원들)이 점유할 공간(객실)도 알아서 꾸린 것 같다.

1149년경 망갈로레를 떠나 아덴으로 돌아가는 길의 화물로 보인다. 한 달 가량 항해 중 승객이 어떤 생활을 했는지 보여주고 나아가 이 승객이 어떤 사람이고 항해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많은 힌트를 주는 목록이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수화물 파악을 위해 작성한 ‘메모’다. 재활용당한 원래 편지에 적힌 ‘신의 이름’ 덕분에 게니자에 들어가 오늘날의 연구자들에게 전해진 것이다.

램번의 미시사에 깊이 따라 들어갈 생각은 없다. 다만 연구방법의 발전이 지금도 연구자의 시야를 빠른 속도로 넓혀주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로 예시한다. 어느 연구자는 벤 이주의 기록 중에 중국 상선의 언급이 ‘없는’ 사실을 주목하기도 했다. 인도 서남해안의 중요한 항구에 다년간 체류한 상인이 남긴 기록 중에 중국 상선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당시 항로의 분절(分節) 상황에 중요한 참고가 되는 사실이다.



역사학도에게 또 하나 비경(祕境), 난파선



게니자문서는 뜻밖의 곳에서 기막힌 경치를 볼 수 있는 하나의 비경이다. 그보다는 잘 알려졌지만 꽤 신비감을 가진 또 하나 자료가 난파선이다. 사람 손이 닿지 않는 바닷속에서 수백 년 잠자고 있던 옛날 배들을 해양고고학이 불러내고 있다.

사람 손이 닿지 않는다고 꼭 잘 보존되는 것이 아니다. 조류 등 물리적 힘으로 부서지기도 하고 화학적 부식과 생물학적 부패를 오랫동안 견뎌내는 난파선은 많지 않다. 보존이 가장 잘 되는 곳은 뻘밭이다. 물리적-화학적-생물학적 손상의 위험이 가장 작은 곳이다.

남양 일대에서 가장 큰 주목을 끈 난파선이 ‘벨리퉁 난파선’이다. 수마트라와 보르네오 사이 벨리퉁섬 연안의 17미터 해저에서 1998년 발견된 약 18미터 길이의 이 배는 830년경 침몰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라비아 배라는 사실이 주목을 끌었다. 이만한 크기의 아라비아 배가 그 전에 없었기 때문에 아라비아 항해사를 고쳐 쓰게 되었다. 이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긴 오만 정부는 “무스카트의 보석”이란 이름의 복제품을 만들어 2010년 5개월의 항해로 싱가포르에 보냈다. (목재의 분석으로 아라비아 제작이란 추정이 나왔으나 인도 제작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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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중의 정밀한 측정 덕분에 복제품 “무스카트의 보석” 제작이 가능했다. 그러나 겉보기는 복원이 됐어도 기능까지는 복원되지 못한 사실을 단 한 차례 항해 중의 숱한 문제들이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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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주목을 끈 것은 금속(못 등)을 쓰지 않고 ‘돌기 엮기(lashed lug)’ 등 남양의 전통적 조선술을 쓴 사실이다. 9세기라면 아라비아든 인도든 철기 사용이 보편화된 시점이었다. 그런데도 철기를 쓰지 않는 남양 조선술을 따른 데서 대륙세력의 초기 조선술에 남양이 끼친 영향을 알아볼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화물 내용이다. 도자기 등 중국 상품이 압도적이다. 이후 시기에는 인도양과 남중국해의 항로가 분절되는데, 이 시기에는 아라비아(또는 인도) 배가 중국에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 항로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 (싱가포르에서 약 610킬로미터) 이 배가 침몰한 이유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벨리퉁 발굴의 정당성을 둘러싼 논란



벨리퉁 유물은 2011년 싱가포르 아트-사이언스 박물관 개관 기념 전시회를 필두로 해외 전시를 시작했다. 그런데 2012년 초 예정되었던 스미소니언 박물관 전시를 앞두고 논란이 일어났다. 일군의 고고학자-인류학자들이 발굴 과정의 문제들과 유물의 상업적 이용을 지적하며 스미소니언의 명예를 위해 전시 취소를 주장한 것이다.

벨리퉁 발굴은 인도네시아 정부의 요청에 따라 뉴질랜드의 탐사업체 시베드 익스플로레이션(이하 “시베드”)이 맡았다. 시베드는 인도네시아 해군의 보호를 받으며 발굴을 진행하고 6년간 기초 연구와 보존 작업을 거쳐 2005년 싱가포르 정부와 센토사 개발공사(싱가포르)에 3200만 달러로 매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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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대부분은 후난성 장사(長沙)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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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각금배(八角金杯)를 비롯한 황금 제품들이 벨리퉁 유물의 수준을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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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리퉁 유물 중 일품으로 꼽히는 찻주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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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리퉁 전시를 지지하는 학계의 목소리도 작지 않다. 유적 훼손의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민간 업자에게 발굴을 서둘러 맡긴 것은 타당한 결정이고, 시베드는 어느 학술기관 못지않게 발굴과 처리를 잘했고, 유물의 통합성을 위해 약 6만 점 유물을 통째로 매각한 것도 학계가 고마워할 일이라는 것이다. 스미소니언은 전시를 연기하고 학계의 토론을 촉구했다.

몇 해 후(2003) 자바 북부의 치레본 앞바다에서 더 큰 배 (약 30미터 길이) 하나가 발견되고 970년경 침몰로 추정되는 이 배에서 중국 도자기를 위시한 7만여 점 유물이 발굴되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민간 업자가 발굴한 이 유물을 2006년 경매에 부쳐 업자와 정부가 반씩 나누기로 했다가 학계의 끈질긴 요구에 따라 7천여 점을 뽑아 박물관에 남겼다.

20세기 후반 저인망어업(trawling)의 확대에 따라 해저유물의 발견이 잦아졌다. 해저유물의 보존에 유리한 뻘밭이 저인망 작업에도 적합한 지형이기 때문이다. 신안 해저유적도 하나의 예다. 육상 유적의 조건에 맞춰 만들어진 문화재 보호 제도가 해저유물의 보호에는 적합지 않은 문제가 많다. 벨리퉁 유물을 둘러싼 논란은 이 문제들을 부각시켜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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