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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 (토)

유품으로 남은 소학교 졸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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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아무튼, 레터]

1950~60년대 명동에서 가장 유명한 주점은 배우 최불암씨의 어머니가 운영한 ‘은성(銀星)’이었다. 문화예술인의 사랑방과 같았다. 가난한 시절에 외상술이 얼마나 많았을지 궁금했는데 최불암씨의 답이 기막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외상 장부를 여러 권 발견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런데 장부에 적힌 이름들을 보고 입이 벌어졌다고 한다. 어머니는 ‘홍길동 5000원’ 같은 방식으로 기록한 게 아니었다. 코주부 1만원, 백대가리 3000원, 왼손잡이 4000원, 안경 2000원....” 값을 나중에 치르기로 한 단골들 이름은 그렇게 암호투성이였다. 외상 장부는 어머니만 아는 비밀과 같았다.

조선일보

일제 시대 소학교 졸업장 /김옥선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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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지방 소도시로 조문을 다녀왔다. 고인은 1923년생. 100세가 넘도록 장수하셨으니 상주는 노인이었고 빈소에는 문상객이 많지 않았다. 백세 시대에 흔해질 가족장(家族葬)의 한 풍경처럼 보였다. 그런데 며칠 뒤 유품을 정리하다 일제 시대 소학교(小學校) 졸업장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수의(壽衣)를 담은 상자에서 나왔는데, 두 아들과 세 딸 등 유족 누구도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소화(昭和) 12년, 즉 1937년에 진주사립시원여학교가 발행한 이 증서는 큰 얼룩이 있었지만 비교적 상태가 좋았다. 그것이 고인의 최종 학력이었다. 상급 학교에 진학해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형편도 시대도 아니었다. 고인은 회갑이던 1983년에 수의를 준비했다고 하니, 졸업장은 40년 넘게 그 상자에 담겨 있었던 셈이다. 열아홉 살에 시집갈 때 왜 그것을 챙겼고 왜 평생토록 소중히 간직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고인은 수의를 입고 떠났고 비밀에 가려진 유산처럼 소학교 졸업장만 남았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는 6·25 전쟁으로 남편과 아들을 잃었고, 중년 이후에는 사위 김지하 시인의 구속과 사형 선고 등을 지켜봤다.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타계한 뒤 나온 유고 시집 제목은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였다. 그 시집을 여는 시 ‘산다는 것’은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로 흘러간다.

세상을 떠나는 날, 유품으로 남겨진 물건이 그 사람을 말해준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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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돈규 주말뉴스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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