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부문장의 평가가 박하다고만 볼 수 없다. 정부는 올해 들어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앞세워 증시 부양을 노리고 있지만, 코스피지수는 지지부진하다. 코스닥지수는 연중 수익률이 마이너스(-) 10%대다. 주요국 지수 가운데 전쟁 중인 러시아를 제외하면 가장 저조하다.
박유경 네덜란드 연기금 APG 신흥시장 주식 부문장. |
개인 투자자는 ‘국장(한국 증시) 탈출은 지능 순’이라며 수익률이 더 좋은 미국 시장으로 옮겨가고 있다. 연기금을 비롯한 기관도 투자 포트폴리오에서 한국 주식 비중을 줄이고 있다. 외국인 투자자마저 한국 시장을 떠나고 있다. 외국인은 지난 7월까지 9개월 연속 한국 주식을 순매수했으나, 지난달부터 매도 우위로 돌아섰다. 이달 들어서 한국 주식 6조원어치를 순매도했다.
박 부문장은 한국 주식시장에 대한 경고음이 지속해서 울려왔다고 진단했다.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지수 내 한국의 위상이 대표적이다. 한국은 MSCI 선진국 지수 진입에 번번이 실패했을뿐더러, MSCI 신흥국 지수 내 비중은 2004년 18.67%에서 현재 11.67%로 줄었다. 1위였던 비중 순위도 중국, 인도, 대만에 밀려 4위로 떨어졌다.
최근 시장에선 MSCI와 함께 세계 양대 지수로 꼽히는 FTSE의 관찰대상국(Watch List)에 한국이 포함될 수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한국은 2009년부터 FTSE 선진시장(Developed Market)으로 분류돼 왔는데, 이 지위가 흔들릴 수 있다는 의미다.
한국 증시 분위기가 바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동안 쓴소리를 아끼지 않아 온 박 부문장에게 서면으로 물었다. 박 부문장이 속한 APG는 세계 3대 연기금으로 꼽힌다. 지난해 말 기준 5770억유로(약 850조원) 규모의 자산을 운용 중이다.
박 부문장은 상법을 개정해 ‘이사의 충실 의무’를 확대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봤다. 이사회를 구성하는 이사가 충실의무를 수행해야 할 대상이 현재 회사인데 주주까지 추가하자는 취지다. 박 부문장은 또 ‘쪼개기 상장’과 같은 나쁜 관행을 뿌리 뽑고,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등의 노력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했다. 이하 일문일답.
지난 27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에서 직원이 업무를 보고 있다. 코스피지수는 이날 0.8% 내려 2640대로 밀려났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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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의 하나로 ‘코리아 밸류업지수’가 발표됐다. 어떻게 평가하나.
“기관 사이에서 원래 큰 기대가 없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이해가 가지 않는 결과가 나왔다.”
―어떤 부분이 가장 납득하기 어려웠나.
“보통 이런 지수가 나오면 투자자들은 리트머스 테스트를 해본다. 예를 들어 가장 주주친화적이고 바람직한 거버넌스(지배구조)를 구현한 기업이 지수에 들었는지, 반대로 논란이 있는 기업이나 관련 회사가 포함됐는지 점검해 보는 식이다.
밸류업지수 구성종목에서 KB금융은 제외됐다. 주주친화 경영의 대표 주자로 시장에서 평가하는데도 그렇다. 반면에 투자자의 평판이 좋지 않은 일부 그룹 계열사가 다수 포함됐다.”
―한국거래소는 다양한 질적 지표가 우수한 기업을 밸류업지수에 담아 국내 주식시장 전반의 가치를 제고하려 했다고 해명했다.
“기업의 주주 친화 정책이나 건강한 지배구조 등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이 지향하는 바가 지수에 일관성 있게 구현돼 있지 않다. 결과적으로 시장 참여자가 혼란을 넘어 진정성을 의심하게 했다. 이런 점을 깊이 생각해 지수 구성 방식 등을 개선했으면 한다.”
한국거래소는 밸류업지수 구성을 두고 논란이 이어지자 지난 26일 브리핑을 열고 구성 종목 선정 기준 등을 재차 설명했다. 거래소는 그러면서 “각계 전문가 의견과 기업가치 제고 계획 공시 추이 등을 고려해 연내 구성종목을 변경하는 방안도 적극적으로 검토할 계획”이라고 했다.
일러스트=챗GPT 달리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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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CI 신흥국 지수의 국가별 비중에서 한국은 2004년 1위에서 현재 4위로 내려앉았다. 중국, 인도, 대만에 차례로 역전당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나.
“중국은 규모 차이가 있어 (MSCI 신흥국 지수 비중) 역전이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하지만 대만에 밀린 것은 기업과 정책 당국 모두 뼈아프게 생각해야 한다. 대만도 완벽한 기업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 시장의 물적분할 후 재상장과 같은 고질적 문제가 비교적 드물게 일어날뿐더러, 개선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투자자 사이에서 대만 시장에 대한 신뢰 자본이 쌓이고, 한국과 격차를 보이게 됐다.
인도는 성장하는 시장이다. 한국은 아직도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시절에 머물러 있다. 한국의 성장이 정체되면서 인도 시장과 경제나 금융 규모 격차가 갈수록 벌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물론 인도 시장도 문제가 많지만 최소한의 민주적 요소와 시장 투명성, 정책 일관성은 있다.
―새로운 성장 기업이 나타나지 않아 한국 시장이 부진하다는 의견도 있다.
“약간 생각이 다르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차와 같은 한국 대표 기업의 그룹 지배구조가 글로벌 기업 수준으로 뛰어나지 못한 게 더 본질적 문제다. 대표 기업이 잘못된 관행을 답습하면 신생 기업도 금세 이를 따라 한다. 이게 시장 전반의 발전이 없는 이유다.”
―국민연금을 비롯한 한국 연기금이 수익률을 고려해 국내 주식시장 비중을 줄이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 증시가 부진하다는 의견은 어떻게 생각하나.
“국민연금 등의 결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한국 시장이 세계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줄고 있고, 그렇다고 재평가(Re-rating)를 기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특히 국민연금은 한국 시장에서 부모 같은 존재다. 상장사들이 지배구조 문제로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때 회초리를 들거나,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도 국민연금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국민연금이 국내 투자를 늘릴 수 있도록 시장의 건전성을 회복하는 게 순서상 먼저라는 뜻이다. 한국 시장이 건강해져 수익률이 나아지면 국민연금도 다시 국내 투자 비중을 올릴 수 있다고 본다.”
―국내 주식시장으로 자금이 유입되기 위해선 무엇부터 바꿔야 한다고 보나.
“일단 첫 단추를 끼우는 것이 중요하다. 상법 개정을 통해 이사의 충실의무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 지배 주주의 이익을 위해 나머지 주주가 희생하는 일이 당연시되는 관행의 싹을 잘랐으면 한다. 나아가 주주총회를 통해 행사할 수 있는 주주의 권한을 강화하고, 그 범위도 다른 시장처럼 넓혀나가길 바란다.”
―금융투자소득세가 뜨거운 감자여서 상법 개정 논의가 뒤로 밀린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금융투자소득세 시행 여부와 상법 개정은 서로 다른 문제다. 각각 잘 해결하면 되는 일을 왜 연결된 것처럼 보는지 그 저의가 의심스럽다.”
―이사의 충실의무 범위를 확대하면 이해상충 문제가 생길 수 있고, 결과적으로 기업 활동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주장이 재계에서 거듭 나온다.
“엄살도 정도껏 했으면 좋겠다. 상법 개정의 취지는 이사회에 참가하는 이사가 대주주의 이해와 나머지 주주들의 이해가 갈라지는 중대 안건 관련 의사결정을 할 때 모든 주주의 이해를 충분히 고려해 최선의 결정을 내리라는 취지다. 아주 드문 경우다. 물적분할을 매년 할 것도 아니니까. 이 정도의 고민거리도 잘 처리하지 못해 기업 활동까지 못 할 정도의 기업이라면 소수 주주가 존재하는 주식시장에 아예 상장하지 말아야 한다.”
권오은 기자(oheun@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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