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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 (화)

[서경호의 시시각각] 기재부에 간 한은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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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서경호 논설위원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어제 정부세종청사의 기획재정부에 가서 최상목 경제부총리와 함께 타운홀 미팅을 했다. 지난 2월 최 부총리가 한은을 방문한 데 대한 답방 차원이었다. 한은 총재가 기재부를 찾은 건 정부 수립 이후 처음이다. 기재부 장관의 한은 방문은 한은법 개정 이후 네 번 있었다. 경제부총리·한은 총재·금융위원장·금융감독원장이 참석하는 거시·금융 정책 최고책임자들의 정례 모임인 ‘F4’가 최근 금리와 가계빚을 둘러싸고 삐걱대는 양상이 노출됐다. 이런 와중에 두 기관의 책임자가 ‘입을 맞추는’ 이벤트를 벌였다는 점에서 모양새는 괜찮았다.



MB정부 땐 ‘열석발언권’ 갈등도

한은 총재의 기재부 방문은 처음

개인과 조직의 자신감 보여준 것

1997년 한은법 개정으로 통화신용정책의 권한이 금융통화위원회로 왔지만 한은의 독립성을 둘러싼 논란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2000년 한은 창립 50주년 기념토론회에서 “중앙은행의 위상을 저해하는 정부 측의 금리 관련 발언은 자제돼야 한다”(김병주 서강대 교수)는 지적이 나올 정도로 정부는 거칠었고, 한은은 수비에 급급했다. 한은의 독립성을 의심하는 ‘한은사(韓銀寺)’ ‘재무부 남대문출장소’라는 한은 비하 표현은 그 후로도 사라지지 않았다.

한은과 정부의 갈등이 공개적으로 드러난 건 이명박 정부 때였다. 2010년 초 기재부 차관이 금통위에 참석해 이른바 ‘열석발언권’을 행사했다. 열석발언권은 기재부 차관이나 금융위 부위원장이 금통위에 참석해 금통위원들과 ‘나란히 앉아(列席)’ 발언할 수 있는 권한이다. 기재부 차관이 기준금리 심의·결정에 참여하는 건 아니지만 정부 인사가 금통위 회의에서 발언하는 것만으로도 금통위원들에게 부담이 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1998~99년 네 차례 활용됐을 뿐 사문화됐던 열석발언권이 MB 때 부활한 것이다. 2010년 1월부터 2013년 2월까지 기재부의 허경욱·임종룡·이용걸·신제윤 차관이 46차례 금통위에 참석한 뒤 열석발언은 중단됐다. 언론 카메라 앞에서 웃을 수도, 찡그릴 수도 없어 어색한 표정을 짓던 당시 차관들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오랫동안 서로 체면을 봐서 비워두던 자리를 정부가 굳이 참석하는 바람에 정부와 한은 간의 정책 불화를 상징하는 인증샷으로 역사에 남았다.

당시 정부와 한은의 갈등은 노무현 정부가 임명했던 이성태 한은 총재와 MB정부 경제팀의 불협화음 탓이었다. 매파 성향의 이 총재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초기엔 기준금리 인하에 적극적이지 않아서, 2010년 이후엔 기준금리 인상 속도를 둘러싸고 정부와 입장 차를 보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한은 총재를 교체해야 한다는 건의가 잦았지만 취임 초엔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반대해서, 금융위기 이후 한은이 경기 부양에 소극적일 때는 박병원 경제수석이 반대해서 한은 총재를 바꾸지 않았다고 회고록에 썼다.

지난 4월 칼럼(‘창드래곤’이 시끄러운 까닭은)에서 쓴 것처럼, 한은은 더 이상 ‘한은사’가 아니다. 돌봄서비스 외국인 노동자 활용, 농산물 수입 검토 필요 등 각이 날카롭게 서 있는 보고서를 발표하며 우리 사회에 구조개혁이 시급함을 강조해 왔다. 한은 총재의 기재부 방문은 총재 개인의 자신감과 함께 한은 조직에 남아 있던 정부에 대한 피해의식이 사라졌음을 보여준다. 지난달 금통위가 금리를 동결한 후 대통령실에서 “아쉽다”는 부정적인 반응이 나왔지만, 그렇다고 한은 노조 등 내부에서 ‘한은 독립성 침해’를 규탄하는 성명이 나왔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대통령실이나 여당 정치인의 금리 언급을 쿨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자신감의 산물이다. 역설적으로 한은의 독립성이 흔들리면 이런 반응이 나오기 힘들다.

금통위는 이달 11일 기준금리를 결정한다. 최 부총리는 지난주 관훈토론회에서 ‘내수 살리기와 집값·가계부채 중에서 하나만 선택한다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내수 살리기’를 택했다. 정부는 금리 인하를 원한다. 한은 총재가 기재부에 간 날, 국채금리가 떨어졌다.

서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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