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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 (목)

“어른도 처음엔 다 어린이였다” [크리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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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종, 송화분분-십이세의 자화상, 2004~2017,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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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승 | 미술사학자·상명대 초빙교수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 글머리에서 어린이였던 사실을 기억하는 어른이 별로 없다고 썼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창문에 제라늄이 있고, 지붕 위에 비둘기가 있는 장밋빛 벽돌집을 보았다”는 말에는 도통 반응 없는 그들은 “100억원짜리 집을 보았다”고 해야 비로소 “정말 예쁜 집이겠다!” 반색하는 존재다. 생텍쥐페리는 코끼리를 통째로 삼킨 왕뱀을 그렸다가 “모자 따위를 그렸다”는 어른들의 핀잔에 화가라는 멋진 꿈을 포기했던 여섯살 때의 기억을 소환하며, 아이의 정서를 상실한 어른들에게 어린 왕자를 만나게 한다.



오랜만에 ‘어린 왕자’를 다시 꺼내 읽은 건 전시 ‘생명광시곡, 김병종’을 보고 나서다. 경성역이라는 이름으로 문 열었던 100년의 역사(驛舍), 문화역서울284에서 펼쳐진 김병종의 회고전은 기억 저편의 동심을 불러냈다. 이때의 동심은 생명을 전하는 바람의 존재를 볼 줄 아는 마음이다. 격정적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음악인 광시곡의 선율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것들을 전시는 가시화한다. 그중 ‘송화분분’은 소나무가 유독 많았던 고향 남원에서 유년을 보낸 작가의 기억 조각이 노란 색점으로 둥둥 떠다니는 작품이다.



“기억 속에 노란 구름이 떠다녀요. 식물생태학자에게서 나중에 들으니 소나무 꽃가루가 바람을 타고 이상적인 배우자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거래요.” 군집을 이룬 작디작은 생명체의 유전자 여행에 감명받은 작가는 2016년부터 생명을 품은 송홧가루를 붓끝 노란 입자로 차곡차곡 화폭에 담아내고 있다. ‘송화분분-십이세의 자화상’은 열두살에 아버지를 여읜 작가의 초상이다. 생명의 씨앗들이 바람결에 떠도는 넋처럼 소년을 위로하는 한편의 시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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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종 작가의 ‘송화분분’ 연작이 걸린 문화역서울 284 전시 전경. 사진 강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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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을 겪은 소년 김병종은 온종일 방에 틀어박혀 책과 그림으로 상실감을 달랬다고 한다. 그때 읽은 시가 이어령의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였다.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우리들의 마음도 흔들린다/ 온 우주의 공간이 흔들린다.” 금 간 아스팔트 도로 사이를 용케 비집고 나온 풀 한포기에 애틋해지는 마음을 화폭에 담게 된 작가가 훗날 이어령 선생과 생명을 주제로 기획전을 열게 된 건 필연이었던 셈이다.



고 이어령 선생은 생전에 작가의 ‘송화분분’ 노란색을 “군주가 입는 곤룡포의 노란색이 아닌 애기똥풀의 노랑”이라며 “생명의 밈(문화 확산 요소)이 퍼지는 색”으로 보았다. 새천년준비위원장을 맡아 밀레니엄의 첫날인 2000년 1월1일 태어난 아기의 첫 울음소리를 전 세계를 향한 생명의 메시지로 내보냈던 당대의 지성은 “가장 고귀한 생명의 울음으로 새천년을 열었다”며 억만금과도 바꿀 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말했다.



어린아이의 눈과 손을 닮은 김병종의 작품을 보며 ‘어린 왕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어린 왕자에게는 어른들이 참 이상해 보였다. 꽃 한송이 향기를 맡은 적도 없고, 별 하나 바라본 적도 없이 셈밖에 할 줄 모르면서 ‘나는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믿는 탓이었다. 어른들이 한때 어린이였던 사실을 기억한다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소중한 것들을 상상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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