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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 (목)

전과 8범 ‘보이스피싱 통장 총책’이 불법 사채업자와 ‘맞장’ 뜬 사연[우리사회 레버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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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피싱 조직에 하루 600개 대포 통장 팔던 ‘총책’

‘완전 범죄는 없다’ 느껴…출소 후 대포통장 예방단체 설립

“피싱·불법사채 모두 ‘대포통장’이 문제…근절 위해 노력”

[우리사회 레버넌트]‘바닥’에서 ‘반전’은 시작됩니다. 고비에서 발견한 깨달음, 끝이라 생각했을 때 찾아온 기회. 삶의 바닥을 전환점 삼아 멋진 반전을 이뤄낸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위기를 겪고 있다면, 레버넌트(revenant·돌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보세요. 반전의 실마리를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헤럴드경제

이기동 한국금융범죄예방연구센터장이 25일 오후 인천 서구 사무실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에 앞서 사진 촬영을 위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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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박지영 기자] “세상에 완전 범죄란 없습니다. 보이스피싱범들한테 하고 싶은 말이, 전화 좀 한 게 무슨 범죄지, 돈 전달해준 게 왜 범죄지, 통장 만들어준 게 왜 범죄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거 다 죄입니다. 착한 일은 작다 해서 아니 하지 말고 나쁜 일은 진짜 작다 해도 하지 말라고 범죄자들에게 얘기해주고 싶습니다.”

한 때 보이스피싱 범죄의 핵심인 대포통장 제공을 책임졌던 ‘총책’ 이기동(42) 한국금융범죄예방연구센터 소장은 헤럴드경제와 만나 이 같이 말했다. 하고 싶은 게 없었던 어린 시절, 오토바이를 훔치면서 시작된 그의 범죄 일대기는 화려했다. 그 정점은 대포통장 총책이었다. “너 통장 30개만 안 만들어 줄래? 한 개에 30만원씩 쳐줄게.” 2004년, 아는 형님의 부탁이 보이스피싱 범죄 가담의 시작이었다.

“그때는 보이스피싱이라는 말도 없었어요. 우리나라에서 보이스피싱이라는 개념이 나온 게 2007년부터였거든요. 보이스피싱은 통장이 핵심이에요. 돈을 받을 그릇이 필요한 거지. 당시에는 한 은행에서 통장을 3개, 4개씩 만들 수 있었어요. 그렇게 아는 사람 다 끌어 모아서 아는 형님한테 통장 30개를 만들어 갖다 주니까 900만원을 딱 주더라고요. 이거 때문에 경찰서에도 한번 불려갔다 왔는데, 사기 방조죄로 100만원 밖에 안 나온거야. ‘야, 이거 돈이 된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통장을 만들었죠.”

이 소장이 하루에 팔았던 통장만 400~600개. 한 개당 120만원을 받고 팔았다. 통장 판 돈만 최고 7억2000만원 상당이다. 그가 통장을 납품한 보이스피싱 조직만 7개로, 전국 조직폭력배들의 통장은 모조리 팔았던 셈이다. 통장은 퀵으로 배달하거나 KTX 특송으로 전달 받아 이 소장이 직접 피싱 조직을 만나 판매했다. 그러다 결국 경찰에 덜미를 잡혀 전자금융거래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형을 받았다. 당시 법정 최고형은 징역 3년이니 무거운 형량이었다.

“교도소를 들락날락 거리다보니 느꼈죠. 아, 세상에는 완전범죄가 없구나. 한국에 있으면 무조건 잡히는구나. 이걸 뼈저리게 느꼈죠. 하루는 어머니가 접견을 왔는데, 2살짜리 조카를 딱 데리고 오시고는 ‘니 잘난 삼촌 얼굴 한번 봐봐라.’ 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기동아, 이제 엄마 자존심 한번만 살려줘. 친구들이 아들 어디 있는지 물어보면 내가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그때 정신차렸죠. 이제 말로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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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동 한국금융범죄예방연구센터 소장이 교도소에서 집필한 ‘보이스피싱과 대포통장의 정체’. [한국금융범죄예방연구센터 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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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이 소장은 하루에 A4 용지 2장씩 꼬박 600 페이지짜리 책 ‘보이스피싱과 대포통장의 정체’ 원고를 썼다. 대포통장 총책으로 활동한 경험으로 보이스피싱 범죄의 생리를 지적한 것. 출소를 한 뒤에는 2015년 한국금융범죄예방연구센터를 차려 금융감독원 등에 범죄예방 강의를 다녔다. 보이스피싱 범죄의 완성은 ‘통장’이라는 개념을 알리고 ▷대포통장 유통을 막기 위해 1일 1계좌 개설, ▷20일 이내 통장 추가 개설 금지, ▷한도제한 계좌의 일일 출금한도 30만원 제한 등 정책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최근 그의 활동 무대는 불법 사채업계다. 불법 사채 범죄 또한 통장이 핵심이라는 점에서 보이스피싱 범죄와 유사하다. 더욱 악질인 점은 주변 사람의 전화번호까지 받아 협박하는 것이라고. 이 소장이 직접 불법 사채를 해결한 사례 중에는 무려 1000%가 넘는 불법 고금리 사채도 있었다. 200만원을 빌려서 1400만원을 갚았는데 1000만원을 더 갚으라는 요구와 더불어 일당은 채무자에게 나체 사진을 요구해 주변인에게 사진을 유포하기까지 했다.

불법 사채 일당을 찾아간 이 소장은 “경찰서 가서 대포통장도 막힐래, 원금만 갚게 해줄래”라며 담판을 지었고, 채무자는 빚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죄질이 나빴던 이 불법 대부업체 조직 11명은 동대문경찰서에 검거되기도 했다. 지금도 이 소장에게 불법 사채를 해결해달라는 요구는 하루에 적게는 8건, 많으면 40건씩 들어온다고 한다. 한국금융범죄예방연구센터에는 ‘감사하다’는 후기 글만 60건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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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동 한국금융범죄예방연구센터장이 25일 오후 인천 서구 사무실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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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장은 불법 사채를 근절하기 위해서도 ‘대포 통장’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보이스피싱에 사용된 대포통장은 바로 잠기지만, 사채나 중고나라 사기에 쓰인 대포통장은 출금 정지가 되지 않는다. 이 소장은 “갈수록 진화하는 지능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또 소년원을 다녀왔던 소년범들을 위해 학교를 만들어 교육하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지나온 길에 대해 후회도 하지만, 결국 이 경험 때문에 예방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갖고 있는 능력을 이로운 도구로 쓰느냐, 아니면 세상에 어지러운 도구로 쓰느냐가 중요한거죠. 이로운 도구로 쓰다 보니 범죄자 출신도, 배운 것 없는 사람도 바뀔 수 있다, 사람은 고쳐 쓸 수 있다는 걸 행동으로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g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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