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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4 (금)

[정동칼럼]국무총리의 존재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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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총리는 ‘한국형 민주공화제’의 관건이 되는 헌법기관이다. 총리는 대통령의 보좌기관이면서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하고 국정 최고심의기관인 국무회의의 부의장을 맡는 정부의 2인자이다. 장관으로 불리는 행정각부의 장을 맡기 위한 자격요건이 되는 국무위원의 임명을 제청하거나 그 해임을 건의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행정권 2인자의 지위를 확인할 수 있다. 군사사항을 포함하여 대통령의 국법상 행위도 총리의 부서가 있어야 한다.

이렇듯 막중한 지위의 총리는 대통령이 혼자서 임명할 수 없다. 반드시 국민대표기관인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정부 2인자의 임명에 국회 동의라는 족쇄를 채운 것은 대통령제의 구조적 문제점인 행정독재의 위험과 의회와 정부 사이의 교착상태를 해소하려는 한국형 민주공화제의 묘수다.

흔히들 현행 정부형태를 ‘제왕적 대통령제’로 단정하지만 2인자 총리제만으로도 타당성이 떨어진다. 윤석열 대통령의 막무가내 행태가 제왕적 대통령의 이미지를 드리우지만 헌정 제도의 본질은 변함없다. 온갖 실정으로 여론상 불신임 단계지만 권력구조의 문제라기보다 불통 리더십과 예스맨 문화의 최악 조합 탓이 더 크다.

민주화 이전에도 총리제가 있었으니 이를 두고 제왕적 대통령제가 아니라고 볼 수 없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반론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우선 유신이나 5공의 대통령제는 권력구조 자체가 대통령에게 제왕적 지위를 부여했다. 대통령은 명실상부한 국가원수로서 행정권은 물론 국회해산권이나 의원추천권처럼 국회를 좌지우지하는 제도적 권한을 가졌다. 헌법재판제는 유명무실하였고 일반사법권도 수장형 대법원장을 두어 대통령의 영향권 아래 두었다. 이런 제도에서 총리제가 ‘방탄용’, ‘대독용’으로 전락한 것만을 탓하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제도를 넘어 정치현실의 차이는 더욱 적나라하다. 유신과 5공에서 제도적 권력은 장식이고 국정농단이 오히려 일상이었다. 법은 통치의 도구였을 뿐 군부, 정보기관, 검경이 제왕적 대통령의 친위대로 나서 국민통제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런 상황에선 총리뿐만 아니라 국회도 사법부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

지금은 어떤가? ‘제왕적 대통령제’인 유신에 항거한 ‘서울의 봄’을 짓밟고 군사반란으로 태동한 5공을 종식시켜 ‘민주적 대통령제’로 전환한 것이 현행 헌법이다. 국회는 입법독재라는 반발이 있을 정도로 첫 번째 국민대표기관의 위상을 확보해왔다. 사법부도 헌법재판소가 민주화를 뒷받침해왔고 대법원도 유신이나 5공 때와 비교할 수 없는 제도적·현실적 위상을 가졌다. 유독 총리만 제왕적 대통령제의 정치적 지체현상으로부터 제대로 해방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소홀히 하고 있는 사이 총리도 헌정에서 공화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왔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윤 대통령 못지않게 제왕처럼 군림하려 했던 박근혜 대통령은 두 번이나 총리를 경질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국회 동의 제도 때문이다. 지난 4월 총선에서 참패한 여당과 한 몸임을 내세워온 윤 대통령도 총리의 사표를 수리하지 못했다. 총리 교체는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명분 삼아 실정을 대신 갚게 함으로써 국정을 전환할 수 있는 중요한 카드인데 그 기회를 날려버린 셈이다.

한편 대통령이 변하지 않을 때 총리가 실정을 바로잡을 수도 있다. 총선 참패의 원인을 충언하고 야당과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을 설득할 수 있다.

그러나 한덕수 총리에게 이처럼 헌정이 필요로 하는 역할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다. 이유야 어떻든 여당 대표마저도 진언할 것이 있다는데 총리는 낯간지러운 ‘용비어천가’를 불러젖힌다. 국회에서 방탄총리의 역할에 적극적이다 못해 철벽총리가 된다. 국민 여론을 들어 국정쇄신을 건의하기는커녕 오히려 국민과 전임 정부를 탓하며 대통령을 역성든다.

이럴 바에야 총리가 왜 필요한가? 대통령을 보좌하면서도 국회의 동의를 뒷배 삼아 대통령을 견제하기도 하는 한국형 대통령제의 공화적 진면목은 이상론에 불과한가? 그래서 ‘분권형 대통령제’라는 모순적 명칭하에 국민들을 현혹하면서 총리에게 2인자가 아니라 실질적 1인자의 지위를 주는 이원정부제로 개헌해야 할까? 자신이 모셨던 전임 대통령을 깎아내려서라도 현직 대통령을 역성드는 예스맨 총리에게 한국형 민주공화제의 명운을 기대해야 하는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이 너무나 서글프고 야속하다.

경향신문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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