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0.06 (일)

[백성호의 현문우답]우주의 근원부터 마음의 달까지…성파 스님의 사자후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중앙일보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예술 작품은 작가의 정신세계를 표현한다. 만약 그 정신세계가 깨달음의 세계라면 어찌 될까. 대한불교 조계종의 최고지도자인 종정 성파(85) 스님이 초대전을 연다.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11월 17일까지 ‘성파선예 특별전-COSMOS’(무료 관람)가 열리고 있다.

첫 전시관 ‘태초(太初)’에 들어서면 큼지막한 그림이 둘 걸려 있다. 하나는 제목이 ‘공(空)’, 또 하나는 ‘만(滿)’이다. 하나는 우주의 캔버스, 또 하나는 우주의 물감이다. 없음과 있음이 둘이 아닌 이치. 그런 우주의 존재 원리를 작가는 예술로 설파한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성파의 사자후(獅子吼)’다.

중앙일보

통도사 서운암에서 성파 스님이 직접 그린 금강산도 앞에 서 있다. 옻을 먹인 한지에 화강암 돌을 갈아서 석분으로 그린 작품이다. 그림의 질감부터 다르다. 불교에서 '금강'은 변하지 않는 진리를 상징한다. 그래서 금강산도는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다. 거기에 담긴 진리를 그렸기 때문이다. 양산=백성호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달 10일에는 통도사 서운암에서, 1일에는 예술의전당에서 두 차례에 걸쳐 성파 스님을 만났다. 그에게 인간과 우주, 그리고 예술과 삶을 물었다.

Q : 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주제가 ‘COSMOS(코스모스)’다. 왜 우주인가.

A : “우주에는 우주 이상이 없다. 우주에 다 포함돼 있다. 거기에는 유형도 있고 무형도 있다. 없다가, 생겨나고, 머물다가, 다시 사라진다. 한마디로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다. 우주에는 그게 다 있다. 그러니까 우주 이상은 없지. 이왕 욕심을 내려면 큰 욕심을 내야지, 하는 마음으로 우주를 담았다.”

욕심이란 말을 썼지만, 실은 ‘안목’이다. 큰 안목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안목이 성파 스님의 작품에는 오롯이 배어있다. 그래서 ‘선예(禪藝)’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한국 미술계에는 생소한 용어다. 성파 스님은 ‘선예’에 담긴 각별한 뜻을 누에에 비유해서 풀었다.

“누에는 뽕잎을 먹는다. 뽕잎을 먹고서 명주실을 뽑아낸다. 소가 뽕잎을 먹는다고 해서 명주실이 나오겠나. 누에니까 명주실이 나오는 거다.”

Q : ‘선예(禪藝)’를 뽑아내는 누에. 어떤 누에인가.

A : “가령 문인화(文人畵)가 있다. 그런데 선비가 그렸다고 다 문인화가 아니다. 문인화가 되려면 ‘문기(文氣)’가 있어야 한다. 그럼 그 문기는 어떻게 생길까. 작가가 학문에 푹 젖어야 한다. 그래야 문기가 나온다. 선예도 마찬가지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성파 스님은 물과 바람을 이용해 우주를 그려냈다. 작품 사이를 걷다 보면 마치 빅뱅 이후 138억년 우주의 역사 속을 흘러가는 느낌이 든다. 백성호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Q : 무엇이 담겨야 선예인가.

“출가자가 그렸다고 다 선예가 아니다. 선예에는 ‘선미(禪味)’가 있어야 한다. 선의 눈, 선의 안목, 선의 기운, 선의 세계가 담겨야 한다. 그래서 선의 맛이 나야 한다. 그게 ‘선미’다.”

A : 이말 끝에 성파 스님은 미륵반가사유상을 예로 들었다. “선(禪)은 ‘닦을 선’자다. 닦는 사람이, 수도하는 사람이 예술을 해야 선예가 된다. 그렇다고 머리 깎은 스님만 하는 건 아니다. 유발자라도 마음 닦는 수행자는 할 수 있다. 반가사유상을 보라. 그건 선예다. 우리는 반가상의 형상을 보면서 그가 잠긴 깨달음의 세계, 그 깊은 고요를 맛본다. 그게 선미이고, 선의 예술이다.”

Q : 서양에는 서양화 붓이 있고, 동양에는 동양화 붓이 있다. 스님께서는 어떤 도구를 쓰나.

A : “아무것도 없는 곳에 점을 하나 찍는다. 그걸 그으면 선이 된다. 그 선을 어떻게 돌리느냐. 거기에 따라 형상이 나온다. 그 형상 안에 색을 넣을 수도 있고, 안 넣으면 수묵이 된다. 중국의 한 미대 교수는 붓 대신 손톱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런 화법도 있다. 나는 붓 대신 물과 바람을 썼다. 물은 흐르는 거고, 바람은 부는 거다. 이건 사전에 의도할 수가 없다. 그런 식으로 자연의 원리, 우주의 원리를 나는 작품에 보탰다.”

Q : 그렇게 다 그려진 작품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나.

A : “아, 이게 순리구나. 순리대로 가는구나. 순리일 뿐이구나. 그런 생각을 한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흙은 고열의 가마를 통과하며 도자기가 된다. 차원의 변화가 생긴다. 성파 스님은 중생이 부처가 되는 이치도 이와 통한다고 말했다. 백성호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파 스님의 작품에는 ‘순리(順理)’가 담겨 있다. 흐르는 것을 따르는 이치다. 예술만 그런 게 아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흐르는 것을 따를 때, 더 자유롭고 더 지혜롭다. 성파 스님의 작품 속에서 그런 순리를 찾아서 맛보는 과정이 관객들에게는 ‘선미(禪味)’가 되지 않을까.

Q :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應無所住 而生其心). 『금강경』의 한 대목이다. 물과 바람으로 이치를 따라가는 스님의 작업 방식을 보면 이 구절이 절로 떠오른다.

A : “사람들은 예술이라고 하는데, 나는 꼭 그렇게만 보진 않는다. 이건 내가 살다 가는 하나의 발자취다. 누가 발자국 찍으려고 일부러 걸어가나. 그냥 걸어가지. 가다 보면 발자국은 저절로 남는 거다.”

중앙일보

성파 스님은 반가사유상을 예로 들며 "깨달음에 만족해 깨달음의 즐거움이 나오는 게 법열이다. 기쁠 열자. 기뻐야 미소가 나온다. 고뇌에는 미소가 안 나온다. 그래서 선예에는 법열의 미소처럼 무언가 환희로운 게 있다"고 말했다. [사진 예술의전당]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작업 방식. 그 과정이 “날마다 좋은 날”이라고 말하는 성파 스님. 문득 궁금해졌다. 성파 스님이 생각하는 ‘삶과 예술’이란 과연 무엇일까.

“누구는 농사를 지을 수도 있고, 누구는 산에서 나무를 할 수도 있다. 어떤 형태로든 살다 보면 흔적이라는 게 남는다. 사람들이 예술이라고 하니까 예술이지, 예술 아닌 게 어디 있겠나. 이 작품들은 그냥 내가 걸어간 발자국이다. 문화가 뭔가. 문화는 결국 인생의 발자취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성파 스님은 "작품을 만들 때 지극정성을 들이는 과정이 나는 즐겁다. 그 즐거움이야 이루 말할 수 없다"며 "그래서 나는 보통 즐겁게 사는 게 아니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옻판에 옻칠한 작품들. 백성호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전시관의 주제는 ‘태초’로 시작해 ‘물속의 달’로 끝난다. 빅뱅 이전의 무(無)에서 출발해 우리의 마음에 뜨는 달까지, 성파 스님은 색과 모양과 질감으로 설법(說法)을 펼친다. 우주의 근원을 관통하며 우리의 마음을 적시기도 하고, 또 밝히기도 한다.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