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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 (월)

[朝鮮칼럼] 정치를 ‘끊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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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바뀔 때마다

‘이게 나라냐’ ‘이건 나라냐’

선언·신념·열정·투쟁만으론

민주주의 실현되지 않아

‘집토끼’ ‘산토끼’ 표현

정말 모욕적이지 않나

무당층 아닌 反정치 늘어

‘무관심 회초리’가 약이 될 수도

요즘 내 주변에 정치를 ‘끊었다’는 사람들이 꽤 많다. 정치와 일부러 멀어지기 위해 신문도 안 보고 방송도 틀지 않는다는 이들의 기백은 ‘백해무익’한 담배 끊기에 필적할 정도다. 노년층만이 아니라 청년층에서도 정치적 무관심이 크게 늘고 있다. 지난 9월 중순 한국갤럽 조사에 의하면 18-29세 청년 세대 가운데 절반 이상이 무당층(無黨層)이었는데, 이들은 중도를 택한 것이 아니라 정치 자체를 기피하고 외면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정치적 무관심은 정치에 대해 마음이 끌리지 않는 상태다. 하지만 여기에도 유형이 있다. 통상적인 것은 ‘정치적 소외’다. 이는 자신의 정치적 선택이 정치적 변화를 끌어낼 수 없다는 무력감의 소산이다. 지지 정당을 찾지 못해 정치 참여를 포기하는 무당층이 대개 이 경우다. 이에 비해 ‘반(反)정치’는 보다 적극적인 차원의 무관심이다. 곧, 기존의 정당 구조나 선거제도 전반을 불신하고 거부하는 정치적 의사 표시다. 이는 무정부주의와는 결이 다른 것으로 민주주의 정치제도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는 데 따른 21세기적 현상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적 무관심도 이런 반정치를 닮아가고 있다.

한국 정치에서 무관심층의 증대는 무엇보다 저조한 가성비 탓이다. 1995년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고 진단했던 나라의 ‘정치 1번지’ 국회의 신뢰도는 2024년 현재 OECD 30국 중 28위까지 내려갔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게 나라냐?’와 ‘이건 나라냐?’가 반복되면서 국민은 선거 피로감과 정치적 자괴감에 깊이 빠져있다. 국정의 생산성과 효율성만 따진다면 일류 기업이나 국제기구 같은 데 외주(外注)라도 주고 싶은 것이 한국 정치다. 민생 부문이라도 말이다.

한국 정치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민주주의를 유난히 교조적으로 받드는 분위기다. 민주주의라는 용어부터 문제라면 문제다. 고대 그리스에서 발원한 민주주의(demokratia)는 어떤 사상이나 이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특정 형태의 정치체제를 지칭하는 것으로, ‘민주정’(民主政)이 본래 의미에 가깝다. 그런데 일본이 한자어로 의역하는 과정에서 ‘민주’ 뒤에 ‘굳게 지키는 주장’을 의미하는 ‘주의’(主義)를 붙였고 우리는 이를 따랐다. ‘굳게 지키는 주장’이란 입장마다 다르기에 ‘너의 민주주의’와 ‘나의 민주주의’가 충돌할 개연성이 열린 것이다. 최근만 해도 민주주의를 서로 자칭하면서 상대방은 반민주, 곧 ‘검찰 독재’나 ‘입법 독재’라 손가락질하지 않는가. 하긴 북한도 민주주의를 ‘주장’한다.

민주주의가 아닌 민주정은 선험적 섭리가 아니라 역사적 발명품이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는 황제나 파라오, 왕과 같은 절대자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당대 다른 고대사회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종류의 정치 공동체였다. 바로 그런 곳에서 등장한 것이 민주정이다. 그것은 납세자 시민이라면 누구라도 자유롭고 평등하게 참정권을 행사하던 정치제도였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참뜻은 ‘인간은 폴리스(polis)적 존재’라는 것이다. 군주정이나 귀족정의 대안으로서 ‘동료 시민들’(fellow citizens)끼리 정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방식과 제도로 고안된 것이 바로 민주정이었다.

민주정을 위한 몇 가지 전제 조건도 생각했다. 무엇보다 자연과 세상에 대한 객관적·합리적 이해가 필요했기에 고대 그리스 시대는 과학이 크게 융성했다. 의견 조율을 위해 지적 사고 능력과 논리적 토론이 중요했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에서 철학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광장을 필수로 하는 도시계획도 빠뜨리지 않았다. ‘인간은 공간을 만들고 공간은 인간을 만든다’고 믿은 결과다. 이들 모두는 민주주의가 선언이나 신념, 열정이나 투쟁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민주공화국을 수립한 지 76년, 민주화를 쟁취한 지 37년이 된 이 시점까지도 우리에게는 이러한 민주정의 사회 문화적 인프라가 너무나 부실하다. 그런 만큼 한국 정치는 민주주의 타령 속에 맨날 싸우는 게 일이다. 팩트가 가짜나 거짓에 밀려나고 특권 의식과 권위주의, 선동과 궤변이 이성적 소통을 가로막는 정치 문화는 오늘날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까지 왔다. 그 결과가 바로 정치적 무당층과 구분되는 정치적 순수 무관심층의 증가다. 물론 이는 단기적으로 민주주의의 적신호다. 하지만 그것이 정치권 전체를 향한 무서운 회초리가 될 수 있다면 장기적으로는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 명색이 유권자인데 언제까지 구제 불능 한국 정치의 ‘인질’처럼 살 것인가. ‘집토끼’나 ‘산토끼’라는 말이 모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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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인 서울대 명예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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