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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8 (화)

[조민근의 시선] 사각지대서 판치는 ‘만고땡’ 낙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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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조민근 경제산업디렉터


“2인자라도 사장이 뭐라 못하는 자리지. 왜냐하면 상임감사는 정부에서 파견 나온 감사라 그냥 만고땡이야. 사실 감사가 사장보다 편하다. 차 주고 기사 나오고….”

한동훈 대표 ‘공격 사주’ 의혹을 일으킨 김대남 전 대통령실 행정관의 녹취록을 들여다보다 ‘만고땡’이란 세 글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 총선 공천은 무산됐지만, 대신 얻게 된 SGI서울보증의 감사 자리도 그리 불만스럽지는 않다는 투다.



‘공격 사주’로 부각된 서울보증

사기업이 시장 독점, 정부 입김

‘혈세’ 공적 자금 회수는 요원

이번 사건으로 서울보증이란 회사를 처음 접한 이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금융권 사정에 밝은 이들이라면 ‘만고땡’이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잘 알려진 금융 공기업들이 ‘신이 내린 직장’이라면, 눈에 잘 안 띄지만 알짜인 서울보증 같은 회사는 ‘신이 숨겨놓은 직장’으로 불린다. 금융 경력이 없는 그가 감사로 선임됐지만 크게 논란이 일지 않았던 것도 그런 연유다. 이런 자리를 용케 찾아내고 본인이 ‘찍어서’ 갔다니, 금융 전문성은 없어도 부지런히 정보 수집하는 능력은 있겠다 싶다.

서울보증이 ‘숨은 알짜’로 불리는 이유는 이렇다. 인사나 운영을 정부가 좌지우지하지만, 법적으로는 공공기관이 아니다. 예금보험공사(예보)가 최대 주주(93.85%)인 민간 금융사 형태다. 외환위기에 쓰러진 민간 회사를 10조원이 넘는 대규모 공적자금을 투입해 되살렸다. 공공기관이 아니니 국회의 국정감사 대상도 아니고, 정부의 경영 평가도 받지 않는다. 예보가 지분을 내놓기 전의 우리금융과 유사한 상태다. 그렇다고 우리금융처럼 언론의 주목을 받지도 않는다. 외부 시선을 딱히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하는 사업도 독과점이다. 취업자 신원보증에서 전세금 반환보증까지 수수료를 또박또박 받아내 한 해 4000억원 이상 이익을 낸다. 글로벌 경쟁에 노출된 다른 사기업들처럼 ‘반도체의 겨울’을 걱정할 일도, ‘차이나 테크’의 공습에 떨 필요도 없다. 사장도 마음이 편할 텐데, 감사 자리야 말해 무엇할까. 반면 보수와 복리후생은 업계 최상위권이다. 그러니 ‘만고땡’이란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아는 사람만 가던 자리다 보니 그간 경영진은 관료 출신의 독무대였다. 하지만 슬슬 소문이 나면서 상황이 변했다. 전문성이 더 떨어진다는 정치권 출신 낙하산까지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아마도 퇴직 관료인 ‘관피아’와 대통령실·캠프 출신 등 ‘정피아’가 사이좋게 나눠 먹는 동거체제가 될 공산이 크다.

또 다른 ‘숨은 알짜’ 한국증권금융이 그 선례다. 증권사들의 예탁금을 받아 관리하는 곳인데 한국거래소와 금융회사들이 주요 주주다. 독점 사업을 하지만 역시 공공기관은 아니다. 박근혜 정부 시절 대통령 연설문을 담당하던 비서관이 감사로 가며 세간에 화제가 되기 시작했다. 이후 나눠 먹기가 고착화했다. 현재는 ‘금융위원회 출신 사장-금융감독원 출신 부사장-대통령실 출신 감사’의 트로이카 체제다.

이 기름진 땅에 성공적으로 착지한 당사자들이야 ‘만고땡’일 것이다. 문제는 그 비용을 민간이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외환위기를 극복한 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서울보증에 투입된 공적자금 중 아직 5조원 이상을 회수하지 못했다. 혈세를 빨리 회수하려면 우리금융처럼 예보 지분을 시장에 팔아야 하지만 아직 첫발도 못 뗐다. 지난해 기업공개(IPO)를 추진했지만 중도에 접었다. 시장이 평가하는 기업 가치가 예상에 못 미친다는 이유에서다. 당시 경영진은 시장 상황 탓을 했다. 하지만 업계에선 좀 다른 얘기도 한다. ‘만고땡 낙하산’이 득실거리고, 방만경영을 한다는 지적을 받는 회사를 급하게 내놓겠다는데 누가 값을 높게 쳐주겠느냐는 것이다. 다시 IPO 시도하겠다곤 하지만 전망이 그리 밝진 않아 보인다.

앞서 언급한 한국증권금융을 놓고도 증권업계엔 잠재된 불만이 있다. 공공기관도 아닌 증권금융에 예탁금을 의무 보관해야 할 이유가 뭐냐는 것이다. 예컨대 탄탄한 은행들에도 자금을 맡길 수 있다면, 안전성에 큰 문제가 없을 테고 경쟁체제가 작동해 비용도 내려갈 수 있다는 얘기다. 이는 투자자들에게도 이득이다. 만약 그래도 공공성과 독점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면 사각지대라도 줄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금처럼 어정쩡하게 두느니 차라리 공공기관으로 지정해 제대로 된 감시를 받도록 하는 게 옳다는 것이다.

수혜자인 정부가 ‘만고땡’ 자리를 스스로 내어놓길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때마침 국감 철이 왔다. 한 대표 ‘공격 사주’도 다뤄야 하겠지만, 이 문제도 같이 짚길 바란다. 그게 ‘민생 국감’이다.

조민근 경제산업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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