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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9 (수)

이슈 선거와 투표

[취재후 Talk] 국민투표로 탄생시킨 헌재, 국회가 마비시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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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국민투표는 총 여섯 차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치러진 건 대통령 선거를 간선(間選)제에서 5년 단임의 직선(直選)제로 바꾸도록 하는 내용 등을 담은 '제9차 개정헌법'에 대한 찬반을 묻는, 지난 1987년 10월27일 국민투표였습니다.

당시 집권 여당의 차기 대선 주자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야권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청을 대승적으로 수용해 이른바 '6.29 선언'을 발표했고, 이후 국회가 '헌법개정안'을 발의해 국민투표에 부쳤던 것입니다. 그 결과 78.2%의 투표율, 93.1% 찬성으로 9차 개헌안은 통과됐습니다.

당시 개헌안에 따라 대법원과 함께 대한민국의 사법부의 양대 축을 이루는 헌법재판소(憲法裁判所, 이하 헌재)도 신설됐는데요. 헌재는 헌법 제111조에 따라 법률의 위헌여부심판, 탄핵의 심판, 정당 해산심판, 권한쟁의에 관한 심판, 헌법소원 심판 등을 관장합니다.

지난달 23일 김복형 신임 헌법재판관은 취임사에서 "어떤 길이 국민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기본권 등을 보장하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법치주의 등 헌법적 가치를 수호하기 위한 최선인지를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직분을 수행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는데요. 이 발언에 헌재가 담당하는 업무와 역할에 대한 설명이 잘 녹아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국민적 합의에 의해 제정된 가치와 도덕규범, 정치와 사회질서 지침 준수 여부를 합리적으로 판단해주는 기관인 헌재가 오는 17일부터는 사실상 '개점휴업(開店休業)' 상태에 돌입합니다.

헌재는 재판관 9명 중 7명이 출석해야 사건을 심리할 수 있는데, 이종석 헌재소장과 이영진·김기영 재판관의 임기가 이날 종료됨에도 국회의 후임자 선출 작업이 지지부진하기 때문입니다.

후보자를 선정하고,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대통령이 공식 임명하기까지 소요되는 기간은 최소 한 달입니다. 10월17일 기준으로, 한 달 전쯤인 9월 20일까지는 후보자 선정 작업이 마무리돼야 했는데, 아직까지도 여야의 이견으로 결정 작업이 계속 미뤄지고 있는 것입니다.

국민 한 사람이라도 억울한 피해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한(恨) 맺힐 일이 없도록 지혜롭게 판단해주는 일이 헌재 역할의 핵심인데 정치권이 장외 샅바싸움만 하면서 사실상 손을 놓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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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헌재가 정치권에서 자주 회자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인 이진숙 방통위원장 탄핵소추 심판의 건을 두고도, 뒷말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헌법재판관 부재 장기화' 우려와 함께 말이죠.

국회의 탄핵소추안 의결로 이 위원장의 직무가 정지되면서, '합의제 의결기구'인 방통위도 '김태규 부위원장 1인 체제'로 전락하면서 개점휴업 상태가 된 건 헌재와 마찬가지입니다.

일시적으로 의결 기능을 상실한 방통위가 공회전 하면서, 정부부처 부재에 따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 몫으로 남게 됐습니다. 구글·애플의 '인앱결제 강제'에 대한 제재가 지연되면서 국내 소비자 피해가 점차 커지고 있고,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망 사용료 부과, AI 부작용으로부터 이용자를 보호하는 법 제정, 데이터 주권 보호책 마련 등도 제자리걸음 중입니다.

갖가지 어려움이 예견되는 상황 속, 헌재가 참다 못 해 국회에 한 마디 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문형배 헌법재판관이 8일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의 탄핵 심판 변론 준비 절차를 마무리하면서, 오는 17일 이후 예상되는 '헌법재판소 마비 사태'에 대한 국회의 입장을 따져 물었습니다.

문 재판관은 이진숙 위원장에 대한 탄핵 심판 정식 변론을 다음 달 12일 열겠다고 밝히면서, "헌법재판관 3명이 공석이 될 가능성이 있다"며 "6명이 남게 되면 헌법재판소법에 따라 변론을 열 수 없는데, 이에 대한 청구인(국회)의 입장은 무엇이냐"고 말했습니다.

이에 이 위원장을 탄핵 소추한 국회 측 대리인 임윤태 변호사는 "특별히 (입장이) 없다"고 답하자, 문 재판관은 "대응 방안도 없으시겠네요"라고 재차 물었습니다.

그러자 임 변호사는 "그건 국회에 알아봐야 할 것 같다"며 즉답하지 못했습니다.

문 재판관은 이진숙 위원장 측에게도 "국회가 탄핵 소추해 탄핵 심판이 열려야 하는데, 국회가 재판관을 선출하지 않으면 국회가 만든 법에 따라 변론을 할 수 없게 된다"며 "대응 방안을 검토해보라. 헌법은 법률의 상위"라고 전했습니다.

문 재판관은 진보 성향 법관 모임 '우리법연구회' 회장 출신으로,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지명한 인사입니다. 이 위원장 탄핵안을 발의하고 처리한 건 국회 압도적 과반 의석의 야당 주도였는데, 새 재판관을 뽑지 않으면 헌재 기능이 사실상 마비된다는 우려에 이같이 언급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런 상황과 관련해 판사 출신의 김기현 의원은 "민주당이 헌법재판관 후보자 선정을 고의적으로 지연시켜 헌정질서를 마비시키고 있다"고 했고, 나경원 의원은 "그들의 정치적 목적은 헌재 구성을 막아 연쇄적으로 또 다른 국가시스템까지 마비시키고, 파괴하는 것"이라며 "이것은 입법부의 쿠테타인 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민주당 측에선 "국회 의석 분포를 감안해 민주당에서 2명을 추천하고, 국민의힘에서 1명을 추천하는 게 순리"라면서 "국민의힘이 2명을 추천하겠다고 과욕을 부리지 않으면 금방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맞서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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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의 대치는, 물론 다른 이유도 있겠으나 헌법재판관들의 성향과도 적잖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짐작이 되는데요. 법조계에선 남은 6명 재판관의 성향을 대체적으로 중도보수3, 중도진보3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여야가 주도권 확보를 위해 서로 "우리가 2명을 추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여당이 이번에 1명을 추천해 '4(보수):5(진보) 체제'가 되더라도 어차피 내년 4월이면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지명했던 2명의 재판관 임기가 종료돼 그 이후엔 '6(보수):3(진보) 체제'로 바뀌는 만큼, 지금 무리하게 맞서면서 임명을 미룰 필요가 없다는 지적이 여권 내부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역시 판사 출신으로 현 헌법재판관들과 비슷한 연배인 전주혜 전 의원은 "이 위원장 탄핵 심판의 경우 6명의 재판관이 동의해야 하는데 기본적으로 탄핵 요건이 갖춰지지 않은 데다, 재판관들이 그렇게 판단하실 일이 전혀 없겠지만 '단순 이념 분포'로만 봐도 '4:5 체제'로 붙어도 기각될 것"이라며 여당의 대승적 양보 필요성을 언급했습니다.

정치권에선 국정감사가 마무리 된 뒤 여야가 합의를 도출해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경우 문형배 재판관이 언급한 '다음 달 12일' 이전에 임명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심판 당시 상황과는 달리, 이 위원장은 직무 수행 이틀 만에 탄핵소추안이 처리돼 검토해야 할 서류가 많지 않다는 걸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요?

국민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기본권 등을 보장하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법치주의 등 헌법적 가치를 수호하겠다는 헌법재판관들의 취임 일성과 달리, 처음 헌법재판소가 신설됐을 당시의 국민투표 취지와 달리, 헌재의 역할과 기능이 일견 정치권에 예속돼 돌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백대우 기자(run4fr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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