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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 (금)

당신 안의 ‘어린 아이’는 무엇을 원하는가… 패션의 원초적 힘을 다시 한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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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이라는 키워드로 펼쳐진 보테가 베네타 25 여름 쇼

조선일보

‘어린 시절’ 이라는 키워드로 전개된 보테가 베네타 25 여름 쇼. 루즈한 실루엣의 스커트와 넓은 라펠이 특징인 블레이저를 조합한 룩이 쇼의 포문을 열었다. /보테가 베네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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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예술작품부터 상업용 상품까지 ‘스토리텔링’을 파는 시대다.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내세워 작품 혹은 제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만, 그 의도가 제대로 읽히지 않을 때도 적지 않다. ‘스토리텔링’이라는 틀만 빌려 그럴싸하게 포장할 때가 그렇다. 잘된 스토리텔링은 무어냐고 묻는다면, 이탈리안 럭셔리 브랜드 보테가 베네타의 25 여름 쇼가 그 교본이 될 것 같다. 패션계의 보석이라 불린 마티유 블라지가 지난 2021년 말 보테가 베네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선임된 이후 이듬해 첫 선을 보인 패션쇼부터 매 쇼마다 예술성과 창의성, 기교 등 모든 면에서 찬사를 독차지하더니 이번 역시 까다로운 패션 평론가는 물론 대중도 함께 사로 잡았다. 평론가를 사로 잡으면 대중성이 떨어지고, 대중이 사랑하면 평론가들이 외면한다는 패션계 법칙을 완벽하게 깨뜨린 주인공이기도 하다.

◇“우리에겐 놀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게 바로 창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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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테가 베네타 25 여름 쇼 전경과 현장에서 활용된 디 아크(The Ark) 라운지체어. 개, 토끼, 판다, 무당벌레 등 15종류의 다양한 동물 형상을 의자로 선보였다. /보테가 베네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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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번 쇼를 선보이면서 ‘어린 시절’이라는 키워드를 뽑아냈다. 세계적인 디자이너와 건축가, 화가 등 아티스트를 만날 때면 곧잘 등장하는 용어 중 하나다. 창의성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 장치는 바로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이라고들 한다. AI처럼 그때 그 시절을 정확하게 읊어낼 수 없기에, 희미한 추억과 환상이 가미된 기억으로 윤색되곤 하기에 어린 시절은 더 당차고 당당하며, 애틋하고 아련하다. 그는 쇼노트(쇼에 대한 자신의 의견이나 철학)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어린 시절, 우리의 일상 속 매일은 모험의 연속이었죠. 환상적인 일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설렘을 느끼며, 통상적인 기대나 관습에 얽매이지도 않았어요. 기이한 현실과 경이로움, 그리고 환상 속에서만 가능할 것 같은 불가능한 시나리오들이 이루어질 것 같은 가능성의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 같았고, 이 모든 것은 전략이 아닌 진정성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마티유 블라지는 ‘어린 시절’이라는 단어 하나로 감정적, 서술적, 시각적, 촉각적 그 모든 감각적 이상을 동원해 영화적 미학을 확장시킨다. 이 영리하고도 천재적인 디자이너는 의상이나 액세서리뿐만 아니라 공간까지도 작품으로 끌어들인다. 연극 같은 공연에서 볼 수 있는 ‘스테이지(무대) 효과’를 새롭게 창출한 인물이다. 바닥부터 의자까지 관람자의 시선과 감각이 닿는 모든 곳에 예술적 장치를 심어놓는다. 그 실험 중 하나가 바로 의자다. 이에 대해 미 뉴욕타임스 같은 유력 매체를 비롯해 보그·엘르 같은 패션 전문 매체 뿐만 아니라 각종 디자인·건축 매거진까지 뛰어들어 평을 쏟아낸다. 일부 패션 브랜드에서 쇼마다 테마를 정하고 각종 무대 장치를 이용해 거대한 설치미술쇼 같은 ‘충격’을 준 적은 있지만, 이렇게 쇼 전반적인 요소가 예술적이면서 동시에 상업적인 가치까지 부여받는 경우는 없었다. 채웠다 부수는 일회적인 이벤트가 아닌, ‘지속가능성’면에서도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다.

그의 무대를 보자. 황금빛 햇살이 가득한 기억 속의 방은 여전히 어린 시절의 물건들이 치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방 안 곳곳에 있는 동물 형상들은 장난스럽고 편안하면서도 고유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 이번 컬렉션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몽환적인 여정을 그리며, 패션이 가진 구원적 힘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티유 블라지의 대담한 상상력이 결합한 성장 이야기를 담아낸다. 이번 컬렉션은 진정성과 유희, 그리고 세련된 어색함(chic awkwardness)을 담은 새로운 형태의 파워 드레싱(power dressing·격식을 갖춘 비즈니스맨과 커리어우먼의 패션 스타일)을 연상시킨다. 블라지는 영국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어렸을 때 부모님의 옷을 입어보고 꾸미기 놀이를 하면서 패션에 대해 처음 경험하는 경이로움에 대한 아이디어에 흥미를 느꼈다”고 말했다. 아름다움을 즐기며 놀 수 있는 자유, 그게 바로 창의성의 발로였다. 블라지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모습으로 등교했다가 하루가 끝나고 구겨진 채로 돌아오는 학교 첫날과 비슷하다”면서 컬렉션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당신 안의 아이는 무엇을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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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는 옷과 액세서리를 통해 어린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며 성인이 되는 과정을 경험하고 성장을 넘어, 또 다른 존재로 거듭나는 여정을 담고 있다. 흐르는 듯 움직이는 실루엣은 일상의 모험을 표현한다. 균형이 흐트러진 가운데, 아이는 어른 흉내를 내며 전형적인 어른의 매력과 우아함은 해체되고, 구겨지고, 흐트러졌다가 재탄생된다. 이러한 철저한 무심함 속에 이탈리아의 세련된 미학과 어린 시절의 유쾌하고 대담한 에너지가 더해져 새로운 발견과 실험이 가득 찬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자신만의 놀이터를 만드는 이탈리아 기업가, 딸의 분홍색 책가방을 대신 메고 학교에 데려다주는 비즈니스맨, 방랑하는 십 대, 슈퍼마켓에 있는 세련된 밀라노 여인, 부모의 슈트를 입고 미래의 자신을 상상하는 소녀와 소년 등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다시 한번 각자의 삶 속에서 자연스레 영웅이 된다. 이 모든 순간의 ‘드레스업(한껏 꾸미는 것) 놀이’는 즐거움과 모험으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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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보여준 여섯 번의 컬렉션을 통해 ‘움직임’이라는 단어를 바탕으로 도시적인 우아함에 대한 정의를 새로 쓰며 미학적 고찰을 완결한 마티유 블라지였다. 그는 이번 쇼를 선보이면서 자신의 세계를 또 한번 확장한다. ‘사르딘’같은 물고기 모양을 가미한 가방 등으로 펄떡이는 듯한 생동감을 부여한 블라지는 동물 등을 이용한 유희적 비틀기로 관객에게 ‘와우 모먼트(wow moment·말문이 막힐 정도로 놀라움과 경이를 일으키는 것)’를 선사한다. 마티유 블라지판 ‘오디세이’ 혹은 ‘율리시스’가 새롭게 펼쳐지는 것이다.

토끼 장식의 라펠뿐 아니라 물고기 모양의 스톨까지, 이번 컬렉션은 동물 모티프로 가득하다. 변화의 상징인 개구리와 부활과 행운을 의미하는 토끼가 강조됐다.

개구리는 브로치 형태로 독특하게 장식되거나 신발의 굽에 매달리고, 손가락을 감싸는 등 유연하게 움직이며 컬렉션 전반에 걸쳐 자유롭게 누비고 뛰어오른다. 토끼는 화이트, 핑크, 그리고 블랙으로 대담한 색감을 더하고, 플러피 뮬부터 시-시(Si-Si) 가죽 티셔츠 등 다양한 카테고리를 넘나들며 기쁨 가득한 흐름을 이어간다. 블라지는 말한다. “대담함에서 오는 매력과 엄격한 정밀성이 충돌할 수 있을까요? 이런 것들이 정말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당신 안의 어린 아이는 무엇을 원할까요? 저는 패션의 원초적인 힘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었어요. 관찰과 발견, 그리고 옷을 입는 행위에 대한 즐거움을 아우르는 성장에 대한 경외감, 바로 그 ‘와우(Wow)!’의 힘을요!”

◇“천재적 완성, 블라지만 할 수 있는 일”

어린 시절 추억을 상기시키고 흥미롭게 놀래킨다며 환호를 지르기엔, 현실은 너무 힘들다. 패션이란 게 최근엔 소유를 떠나,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주는 판타지적인 돌파구 같은 요소를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장난스러움은 일회적이다. 마티유 블라지가 ‘아이다움을 추구하는’ 여느 디자이너와 차별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그의 완성도는 탁월하다. 미국 보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마티유 블라지는 모든 컬렉션, 런웨이 쇼, 캠페인을 세심하게 큐레이팅하고 있다. 면 셔츠인줄 알았는데 가죽으로 만들어졌다거나, 분명 가죽으로 만든 드레스인데도 독특한 반짝임 때문에 마치 스팽글(반짝이는 소재)로 겹겹이 만들어진 것처럼 믿게 만드는 건 오직 블라지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관념과 편견과 한계를 넘어서는 것, 그것이 블라지가 패션계에 선사한 선물이다. 이번 컬렉션에서는 다양한 소재를 활용한 실험 또한 돋보인다. 전체가 가죽으로 돼 있는 파예트(paillette·의상을 반짝이게 장식하는 재료) 이브닝드레스를 비롯해 보테가 베네타의 ‘정신’이자 ‘원천’인 가죽 아이템은 다양하게 변형되고, 트로피컬 웨이트 메리노 울(tropical weight merino wool·양모 중 가장 가벼운 소재 중 하나)은 스톤워시 데님(물빠짐 효과가 가미된 데님)을 모방한 자카르(날실을 엇바꾸어 아래위로 이동시키는 기계로 직조한 무늬 있는 천) 소재로 재단됐다. 일회용으로 사용되는 장바구니가 장인들의 정교한 제작 과정을 거쳐 가치 높은 가방으로 탄생하고, 보테가 베네타의 베스트 셀러 중 하나인 안디아모 백은 탑 핸들(손잡이)이 추가돼 실용적이면서도 더욱 재치있다.

☞쇼의 또 다른 피날레 ‘디 아크’

보테가 베네타의 25 여름 쇼 공간에 들어선 의자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티유 블라지가 이탈리아 고급 가구디자인 회사 자노타(Zanotta)에 의뢰해 제작됐다. 디 아크(The Ark·노아의 방주)라고 이름 붙은 이 한정판 라운지체어(안락의자·등판이 비스듬하고 푹신한 일인용 의자)는 자노타의 대표적인 제품 중 하나인 사코(Sacco)에서 영감을 받았다. 노아의 방주를 뜻하는 ‘아크’라는 이름에서 보듯, 노아의 방주에 탑승한 여러 동물들을 형상화하는 한편, 마치 어린 시절 가지고 놀았던 동물 인형 느낌을 준다. 사코 의자는 1968년 피에로 가티, 세사레 파올리니, 프란코 테오도로가 디자인한 작품으로, 보테가 베네타 초기 가방의 특징이었던 부드러움, 비형식주의, 유연함, 그리고 유동성과 같은 요소들을 동일하게 담고 있다. 모두 가죽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가 낮아 앉았을 때 색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다. 쇼를 위한 용도 뿐만 아니라, 이 의자를 통해 사용자들에게 언제 어디서든 더욱 편안하면서도 유쾌한 경험을 선사하고자 한 것이다. 개, 판다, 토끼, 무당벌레, 뱀, 새, 닭, 공룡, 수달, 코끼리, 고양이, 여우, 곰, 말, 그리고 고래로 이루어진 15종류의 동물 형상의 체어는 다양한 컬러로 선보인다. 보테가 베네타 공식 웹사이트를 통해 구매 가능하며, 6개월에 걸쳐 소량 판매 예정이다. 모든 동물 형상의 의자는 두 마리씩 출시된다. 특히 ‘디 아크’ 에디션은 오는 12월 1일부터 8일까지 미국 마이애미에서 열리는 ‘디자인 마이애미’에서 다시 만나볼 수 있다. 이곳에서만 연회색 토끼와 흰색 닭 형상 의자가 독점 판매될 예정이다.

[최보윤 편집국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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