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오전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에서 열린 국군의날 기념식에서 미국의 전략폭격기 B-1B 랜서가 비행하고 있다. 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지난 1 일 제 76 주년 국군의 날 기념행사 때 등장한 미국 공군의 폭격기 B-1B 랜서를 두고 ‘죽음의 백조’란 국내 언론 보도가 쏟아졌다 . 북한도 죽음의 백조란 표현을 쓴다 . 지난해 3 월 말 북한의 대외 선전매체 ‘ 우리민족끼리 ’ 는 “‘ 죽음의 백조 ’ 로 악명높은 B-1B 편대는 올해 들어와 걸핏하면 남조선 상공을 돌아다니며 상서롭지 못한 검은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있다 ” 고 주장했다 .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국내 언론과 북한까지 B-1B를 ‘죽음의 백조’라고 부를 만큼 널리 퍼진 이유는 그럴 듯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B-1B가 비행하는 모습이 마치 목을 들고 날아가는 백조 같다. B-1B는 미국 전략폭격기들 중 가장 빠르고 가장 많은 폭탄(약 56t)을 싣는데다 레이더로 탐지하기 어렵다. 유사시 은밀히 침투해 적진을 초토화시켜 적에겐 저승사자나 다름없으니 ‘죽음’이란 이미지와도 어울린다.
죽음의 백조는 직관적이고 그럴 듯하지만 국내 전용 이름이다. 정작 B-1B의 주인인 미국은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미 공군 관계자들은 한국 기자들에게 “한국에선 왜 B-1B를 죽음의 백조로 부르냐”고 궁금해한다. 공군 항공기에는 고유명칭과 통상명칭(별칭)이 있다. B-1B가 고유명칭이고 별칭은 ‘랜서’(Lancer)다. 랜서는 랜스(창·Lance)를 사용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말을 타고 창으로 싸우는 기병(창기병)이다. 중세 전쟁까지는 말을 탄 창기병은 전투 초기 창을 들고 선두에서 돌격해 적의 진영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했다. 전쟁 초기 적 지휘부와 주요 시설을 폭격해 파괴하는 B-1B 임무와 비슷하다. B-1B는 생김새도 창처럼 생겼다.
사람 이름을 아무렇게나 짓지 않듯이 공군 항공기 이름도 엄격한 명명 기준이 있다. 한국이 미국 공군 시스템을 대부분 가져와 양국이 공군기 이름 짓는 방식도 비슷하다. 항공기 고유명칭은 영문자 알파벳과 숫자로 이뤄진다. 알파벳은 항공기가 맡는 임무를 뜻한다. A는 공격기(Attacker), B는 폭격기(Bomber), C는 수송기(Cargo), F는 전투기(Fighter), H는 헬리콥터(Helicopter), T는 훈련기(Training)를 뜻한다. 알파벳 다음의 숫자는 대개 임무별 항공기가 도입된 순서를 뜻한다. 군 당국은 B-1B 첫 글자 B에서 폭격기임을 알 수 있듯이 이름만 듣고도 공군기 임무, 성능까지 가늠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일반 국민에겐 B-1B가 뜻 모를 암호처럼 들린다.
‘백조’로 불리는 러시아의 ‘Tu-160’ 전략폭격기는 기체가 백조처럼 흰색이다. 투폴레트 누리집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그래서 공식명칭 외에 국민들에게 친근하고 오래 기억할 수 있는 별칭이 등장했다. 지난 7월 퇴역한 F(에프)-4 전투기의 별칭은 ‘팬텀’(도깨비)이다. 비스듬히 아래로 내려온 수평 꼬리날개 사이로 두 개의 엔진이 내뿜는 붉은 화염이 도깨비 얼굴처럼 생겨 팬텀이란 별명이 붙었다.
B-1B는 기체 전체가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회색으로 도색돼있다. 죽음의 ‘흑조’라면 모를까, ‘백조’란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다. 국제적으로 백조로 불리는 군용기는 따로 있다. 러시아의 ‘Tu-160’ 전략폭격기를 만든 투폴레트는 누리집에서 “그 힘과 우아함으로 인해 Tu-160은 비공식적으로 백조(White Swan)로 명명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반도 긴장이 높아질 때 ‘죽음의 백조’가 한반도로 전개해 한국 공군과 공중훈련을 했다는 국내 언론보도가 번역되어 배포되면, 외국 공군에선 “러시아 공군이 왜 한국군과 훈련을 하느냐”는 물음이 나온다고 한다.
한국 공군에도 진짜 백조가 있다. 2019년 전력화된 공군 다목적 공중급유수송기 KC-330 의 별칭은 별자리 백조자리를 뜻하는 ‘시그너스’(Cygnus)다. 우아한 이착륙 모습, 백조들이 브이(V)자 대형과 비슷한 공중급유 모습을 참고하여 시그너스란 이름이 붙었다.
대부분 공군 항공기가 짙은 회색인데 시그너스는 흰색에 가까운 옅은 회색이라 백조 이미지와 어울린다. 공군은 “KC-330 도입 당시 제작사는 공중급유기 작전 환경을 고려해 중간 회색 도색을 추천했다”며 “제작사 추천 및 위장성, 내구성, 기름을 공급받는 수유기 안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무광의 중간 회색 도색이 적절한 것으로 최종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4월12일 공군 다목적 공중급유수송기 KC-330 시그너스(가운데)가 피급유기인 F-15K와 KF-16 전투기 편대와 함께 공중급유임무 수행을 위해 대형을 유지하며 비행하고 있다. 공군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 항공기는 주 임무가 공중급유지만 국외 재해·재난 발생 시 현지 체류 우리 국민 이송이나 파병부대 화물·병력 수송, 국군 전사자 유해 봉환 등에 투입됐다. 시그너스는 유럽 에어버스가 만든 A330 여객기를 개조해 만들어, 수송기로도 각종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시그너스는 지난 5일 이스라엘군이 시아파 무장정파 헤즈볼라를 겨냥한 공격이 벌어지는 레바논에서 교민 96명과 레바논 국적 가족 1명을 태우고, 경기 성남시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레바논 교민들은 “밤마다 폭탄이 떨어지는 레바논에서 한국으로 무사히 도착할 수 있어 다행”이라며 “수송기를 보내줘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레바논 교민들에게 베이루트 공항에서 만난 시그너스는 ‘생명의 백조’로 다가왔을 법하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권력에 타협하지 않는 언론, 한겨레 [후원하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행운을 높이는 오늘의 운세, 타로, 메뉴 추천 [확인하기]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