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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3 (일)

‘칵테일 얼음이 녹기 전에’ [한경록의 캡틴락 항해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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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크라잉넛’ 기타리스트 이상면이 먼저 읽고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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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록 | 밴드 ‘크라잉넛’ 베이시스트



12년 전, 홍대 상수역 근처 비닐 지퍼팩에 예쁜 색깔 칵테일을 담아주는 칵테일 바에 혼자서 자주 놀러 갔었다. 서너평 정도 되는 작은 공간이었다. 놀이동산처럼 동화 같고 몽환적인 분위기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칵테일은 그 당시 삼사천원 했던 것 같다. 그때만 해도 그렇게 비싼 가격은 아니었다.



주말이면 뮤지션, 화가, 디자이너, 문인, 직장인, 대학생, 프리랜서, 관광객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가볍게 인사 나누고 예술에 관해 토론하고 마시고 흥에 겨워 춤을 춘 사람도 있었다. 아! 그때 춤을 춘 사람은 아마도 나였던 것 같다. 나는 단골이어서 신청곡을 받아주는 편이었는데, 그때 라벨의 ‘볼레로’를 신청했고 15분이나 되던 음악에 빠져 춤을 췄던 것 같다. 사람들은 저마다 알록달록 색깔의 비닐 칵테일을 액세서리처럼 들고 청춘의 고단함을 달랬다.



평일이면 비교적 한산했다. 혼자 바에 앉아서 손님들 구경도 했는데, 가끔 밤 10시쯤 외국인 노동자가 오곤 했다. 그 손님은 천원짜리와 동전들을 카운터 앞에 늘어놓고, 꼼꼼히 세어가며 계산을 하고 흐뭇한 미소로 칵테일을 기다렸다. 바 사장님도 기분 좋은 미소로 계산하고 정성스레 칵테일을 만들어 주셨다. 그리고 그 손님은 20분가량 고혹적인 그 빛깔을 음미하며, 보는 사람까지도 행복해질 정도로 맛있게 칵테일을 마셨다. 아마도 그 시간대 지구상에서 가장 맛있는 칵테일이 아니었을까?



손님이 떠나간 뒤로 바 사장님과 얘기를 나눴다. 일주일에 두세번 이곳에 들른다고 했다. 그리고 꼬깃꼬깃해진 천원짜리들과 동전을 모아서 계산을 하고 칵테일을 주문하는데, 자신에게 어떤 손님보다도 감사한 손님이라고 했다. 정말 열심히 일한 돈으로 비닐 칵테일의 진정한 맛을 알아주고, 그 공간 자체를 사랑해주며,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 나가는 좋은 에너지를 주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손님이 멋있다고 느껴진 이유는 자신만의 취향을 즐긴다는 것 때문이었다.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이 위스키 마시는 장면을 보고 옛 생각이 떠올랐다. 주인공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힘들게 생활을 해도 취향은 포기할 수 없다. 방을 빼더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싱글몰트 위스키 한잔을 선택하는 장면은 왠지 모를 뭉클한 위로를 건네준다. 요즘처럼 비교로 인한 불안과 상대적 박탈감이 우울한 안개처럼 퍼져 있는 시대, 당당하게 일하고 예쁜 칵테일처럼 자신만의 취미와 취향을 즐기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방향이 아닐까 싶다.



갑자기 그 비닐 칵테일 바에서 추억이 떠올라 마티니 위에 고명처럼 올려진 올리브 같은 일화를 짧게 소개해 본다. 2월 초였고 새벽 2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얼큰하게 취해서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꽤나 추운 날씨였는데, 비닐 바 앞에 있는 벤치에 홀로 앉아 있는 외국인을 보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가끔씩 가던 인도 카레집 직원이었다. 여기서 뭐 하냐고 물었더니 자기 생일인데, 한잔하려고 비닐 바에 왔는데 문을 닫아서 혼자 그냥 앉아 있다고 했다. 안면도 있고 나이도 비슷하고 선한 친구여서 우리 집에 데려가서 유튜브 인도 계정으로 접속해서 인도 노래 틀고 같이 춤추고 놀았다. 아! 남자였다. 집에 남아 있는 술이라고는 본가 아버지 술 장식장에서 가져온 미니어처 양주밖에 없어서 그거 마시고 춤을 춘 기억이 떠올랐다.



글을 쓰다 보니 칵테일 한잔이 간절해져서 빨리 마무리를 해야겠다. 평소 같으면 벌써 대문을 열고 총알처럼 밖으로 튀어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10월에 공연이 많아서 30일 동안 금주를 선언했기 때문에 오드리 헵번 눈썹처럼 생긴 그믐달이 뜰 무렵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30일 동안 매일 3㎞를 달리는 ‘303 챌린지’를 아무도 안 시켰는데, 혼자서 하고 있다. 이제 나의 선언이 칼럼에까지 실리게 되었으니 꼼짝없이 약속을 지켜야만 한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칵테일은 역시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 후, 땀 흘린 뒤 마시는 칵테일 한잔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에게 우리의 음악이 칵테일처럼 기쁜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칵테일 얼음은 생각보다 빨리 녹는다. 칵테일을 너무 천천히 아껴 마시면, 얼음이 녹아서 칵테일 본연의 맛이 희석된다. 혹시 하고 싶은 일을 망설이고 있을 때, 너무 오래 망설이지 말고 일단 저지르자. 짝사랑하고 있다면 어서 빨리 고백하자. 칵테일 얼음이 녹기 전에. 칵테일처럼 반짝이는 우리의 순간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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