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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 (월)

폭력 앞에 선 성소수자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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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성별, 성 정체성, 나이, 장애 유무 등과 무관하게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모두를 위한 화장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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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류영재 | 의정부지방법원 남양주지원 판사



작가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 선정 소식을 접하고 한동안 들뜬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노벨상이 국위 선양의 대명사로 자리 잡은 지 오래이기에, 문학은 국가를 대변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노벨 문학상은 문학과 어울리지 않는 상이라고 삐뚜름하게 투덜거려 왔는데, 막상 좋아하는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니 가슴이 벅찼다. 그녀의 작품들이 가진 강렬함은 원래부터 존재했던 것이지 문학상 수상으로 인해 비로소 부여된 것이 아님에도 마치 그런 것 마냥 뿌듯했다. 언론과 SNS를 타고 넘쳐흐르는 기쁨의 물결에 동반하여 함께 즐거워하다 정신 차려보니 한 작가는 전쟁으로 사람들이 고통받는 시기에 잔치를 벌일 수는 없다며 기자회견을 거부하고 있었다.



한 작가가 글을 쓰며 천착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나는 그녀의 소설에서 ‘폭력’을 읽었다. 통념 내지 정상성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는 폭력, 국가 권력과 지배적 정치 이념에 복무하는 폭력, 각자의 ‘정의’를 뒷배로 하여 휘두르는 폭력. 그러한 폭력은 구조화되어 잘 보이지 않거나 역사적 과정에 불과하다며 정당화되거나 의도적으로 잊힌다. 한 발짝만 물러서면 폭력임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폭력을 마주한 개인의 고통은 결코 가벼울 수 없음에도 말이다. 나를 둘러싼 세상이 폭력으로 다가올 때, 그 압도적인 무도함 앞에서 사람은 어떻게 부서지고, 저항하고, 살아가게 되는지를 구체적으로 그려냈기에, 한강의 소설에서는 역설적으로 폭력의 거대담론이 걷히고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사람들이 보인다. 시대의 비극이라고 결론 내는 대신 우리 주변에서 끝없이 변주되는 폭력의 구조와 가려진 개인들을 살펴보게 만든다.



“상상해 보세요. 장시간 외출할 때면 화장실을 가지 않기 위해 그 전날 밤부터 물 마시는 것을 최대한 참고, 그러다 결국 외출 자체를 하지 않게 되는 삶을. 학교에 다니거나 직장을 다니거나 친구를 만나는 등 모든 외출을 할 때마다 똥오줌을 참는 고통을 각오해야 하는 삶을. 견딜 수 있으세요?”



성소수자 인권을 다룬 세미나에서 강연자가 꺼낸 서두다. 강렬했다.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무엇인지, 그것은 다름에 대한 합리적 차이인지, 아니면 같은 것에 대한 불합리한 차별인지, 같음과 다름의 법적 기준은 어디에 놓여 있는지 등등 추상적인 개념의 연장선상에서 트랜스젠더의 사회적 성별에 따른 화장실 사용과 성중립 화장실 개설을 생각하던 중이었다. 발제자의 말은 ‘집 밖에서 맘 편히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하는 개인의 구체적 삶’을 내 눈앞에 그려냈다. ‘외출 시 화장실 사용 금지’는 얼마나 폭력적인가. 그러한 폭력이 지난 교육부 국정감사에서 펼쳐졌다.



서울시교육청 교육자료에서 ‘모두를 위한 화장실’을 성별, 성 정체성, 나이, 장애 유무 등과 무관하게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라고 설명한 것에 대하여, 한 국회의원이 교육부 장관에게 따져 물었다. 그의 질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대한민국은 동성애가 인정되는 나라인가, 아닌가’ 교육부 장관은 놀랍게도 인정되지 않는다고 답한다. 국회의원은 ‘법률적으로 동성애가 인정되지 않는 나라에서 교육자료에 동성애를 포함한 모두를 위한 화장실을 적시한 것은 법령위반’이라고 주장하며 시정조치를 주문했고, 교육부 장관은 사실관계를 확인하여 조치를 취하겠다고 답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한민국은 법률상 동성애가 인정되는 나라다. 동성애를 법적으로 금지하거나 처벌하지 않는다. 나아가 대부분의 동성애자는 각자의 생물학적 성별에 따라 화장실을 사용한다.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동성애와 무슨 상관인지 알 수 없다. 성소수자와 관련하여,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는 대상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집 밖에서 화장실 사용 금지’를 사실상 강요당하는 트랜스젠더가 될 것이다. 이러한 결론과 별도로 위 국정감사의 짧은 질의응답은 성소수자들에게 공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이 된다.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은 성소수자 국민을 불법적인 존재로 폄훼했고, 교육부를 책임지는 장관은 성소수자 학생들을 보호해주지 못했다. 심지어 국회의원은 동성애자를 위한(?) 화장실을 만드는 것이 불법이라는 취지로 주장했는데, 그 주장의 이면에는 동성애자든 트랜스젠더든 그들의 똥오줌 참는 고통은 일절 고려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에게 법적으로 ‘외출 시 화장실 사용 금지’를 명할 수 있다는 무신경함과 무도함이 자리한다. 참고로 행정법원은 트랜스젠더의 사회적 성별에 따른 화장실 사용을 제한하는 것은 성별 정체성을 이유로 한 차별에 해당한다고 판시한 바 있다.



작가 한강은 거대한 폭력 앞에 선 사람들을 집요하게 추적하며 ‘지극한 사랑’을 담았다고 소회를 밝혔다. 질기고 강한 희망이다. 그 희망에 연대하며 성소수자에게 가해진 폭력의 본질을 짚어낸 대법원의 판시를 인용한다.



‘가족 구성원에게 예고 없이 닥치는 질병과 사고 앞에서 과거 ‘의료보험이 없는 가정’은 ‘의료보험이 있는 가정’보다 의료기관의 문턱을 더 높게 인식하였다. 그들은 의료기관의 문턱 밖을 서성이는 외부자로서 제도로부터 ‘배제된 신분’임을 깨닫는다. (…) 배제에서 오는 소외감은 사회구성원으로 한 개인이 가지는 존재가치를 잠식한다. (…) 사회구성원으로서 한 개인이 이룬 동반자 관계가 오직 동성 간의 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국가가 운영하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안전망인 건강보험제도의 보호에서조차 공식적으로 배제되는 것은, 당사자에게는 사회와 국가의 공인된 보호를 받을 존재가치를 부정당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인간 그 자신을 이루고 있는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에 따라 스스로 인격을 형성하고 가정공동체를 이루며 그 안에서 삶을 영위할 권리에 대한 감내하기 어려운 중대한 침해가 될 수 있다. 이 상황이 당연하게 여겨진다면, 한 개인은 자신의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확인하고서도 이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펼칠 공간을 찾을 수 없다. 편견과 혐오의 시선, 나아가 배제의 결과를 피하고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없다. ‘숨겨진 나’와 ‘드러내는 나’가 따로 존재하는 분열의 상태에서 불안한 삶을 강요당할 수 있다. 이 지점이 이 사건 처분의 헌법적 정당성을 판단할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우리 헌법의 근본적 방향성을 담은 헌법 제10조를 거듭 읽어 볼 필요가 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특히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대법원 2023두36800 전원합의체 판결 중 김상환, 오경미 대법관의 별개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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