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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 (월)

[뉴스룸에서] 노벨상은 화석이 되길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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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출신 노인 남성만 받던 노벨상
'아시아 50대 여성' 한강 수상 이례적
'화석' 되지 않으려는 노벨상의 변화
도서 검열 한국 '보수'는 이미 화석화
반지성주의 폭력, 보수 아니라 말해야
한국일보

르피가로, 르몽드, 리베라시옹, 라크루아 등 프랑스 주요 일간지들이 11일(현지시간) 한국 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은 소설가 한강(53)을 지면에 특집 기사로 소개하고 있다. 파리=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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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수상에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들 한다. 세계적 업적을 남기는 것과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벨상 수상자의 나이가 워낙 많아 생긴 우스개다. 실제론 두 가지 조건이 더 있다. 미국, 유럽, 또는 일본 출신에 남성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선정 관행으로 노벨위원회는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는 비판을 받아 왔다.

그랬던 노벨상이 변하고 있다. 2009년 처음으로 여성 경제학상 수상자가 나온 후로 여성 수상자가 조금씩 늘고 있다. 특히 올해 노벨상은 '깜짝 파티' 같았다. 노벨물리학상과 화학상을 인공지능(AI) 전문가들에게 수여하고, 문학상은 한국의 50대 여성 작가 한강에게 돌아갔다. 노벨위원회가 '이제 우리도 과거가 아닌 미래를 보고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법하다.

이런 변화의 배경은 무엇일까? 아마도 노벨상이 '보수'를 지나 '화석'이 돼가고 있다는 자각 때문일 것이다. 100년 넘는 권위를 지키려는 보수적 태도가 오히려 상의 가치와 권위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한강은 우리나라 보수 정권에선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그의 책은 "편향적"이라며 지원사업에서 배제됐다. 특정 종교 성향의 보수 단체들이 주도한 '성교육 유해 도서 퇴출' 운동의 영향으로 학교 도서관에서 내쳐지기까지 했다.
한국일보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지난해 경기도교육청의 공문을 받은 학교들이 '성교육 유해 도서'로 지정해 폐기한 도서 중 하나로 나타났다. KBS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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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경기도교육청은 한 보수 시민단체의 보도자료를 첨부해 '성교육 유해 도서'의 폐기를 사실상 종용한 공문을 반복해 각급 학교에 보냈다. 이는 한강의 소설을 포함한 2,500여 권의 도서 폐기로 이어졌다. 교육청은 "각 학교 운영위원회의 자율적 결정"이라고 주장하지만, 제멋대로 유해 도서 목록을 정한 특정 단체의 주장을 공문에 첨부한 것은 학교에 압박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성소수자 혐오를 공공연히 드러내는 이들 단체의 주장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며 차별을 받지 않는다"는 헌법 11조를 사실상 부정한다. 전화와 문자 폭탄, 민원 폭탄, 공청회에서 고성 지르기 등 조직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전국 각 지자체에서 만들어진 인권 조례를 폐지시키고, 입맛에 맞지 않는 도서를 도서관에서 퇴출시킨다. 서울에서도 곧 치러질 교육감 선거 결과에 따라 수천~수만 권의 도서가 학교에서 사라질지 모른다.

'반지성주의 폭력'이라 부를 만한 이들 행태가 드러내는 바는 분명하다. 우리나라에서 '보수'는 더 이상 보수가 아니라 '화석'이 됐으며, 나라와 공동체, 개개인의 행복과 발전을 저해하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 시절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예술가들이 아카데미상, 에미상, 노벨상까지 받았다. 그런데도 보수를 참칭한 혐오 세력이 자신들이 이미 화석이란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은, 이들의 조직력만 보는 정치 세력과 언론이 계속 이들을 '보수'라 불러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기들은 헌법 가치까지 부정할 정도로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면서도 소수자 인권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편향됐다"고 비난하는 이들의 이중적인 행태는, 언론이 취하는 '기계적 균형'이 자칫 공동체의 미래를 위협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노벨상은 화석이 되기를 거부했다. 우리 사회도, 언론도 그래야 한다.

최진주 기자 parisc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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