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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5 (화)

[신세철의 쉬운 경제] 우리는 "모두가 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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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신문사

80년대 중반인가 장흥 앞바다 파도와 김발을 두고 벌어지는 갈등을 그린 한승원 작가의 소설 '그 바다 끓며 넘치며'를 읽고 줄거리보다 문장에 자연과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이 깃들었음을 느꼈다. 파도치는 바다와 어민들의 생명줄인 김발에 대한 작가의 깊은 애정을 읽을 수 있었다.

수십 년 후 그의 딸 한강 작가가 소설 '채식주의자'로 '맨부커 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듣고 장흥 태생인 어떤 선비에게, 한강이 우리나라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사실, 소설 '채식주의자'를 읽기는 읽었어도 작가가 던지는 깊은 뜻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어릴 때 굿판에서 벌어지는 작두춤을 보면서 가졌던 비현실적 느낌도 가졌다.

그 뒤로 우리나라 정남진 앞바다의 수평선과 푸른 파도를 보고 싶었으나 약속이 자꾸 틀어져 아직도 가지 못했다. 수년 전 서점에서 두리번거리다 "할매들은 詩방"이라는 시집을 집어 들었다. 장흥 '시골 할머니'들이 뒤늦게 한글을 깨치고 시를 배워 엮었는데 할머니들의 꾸밈없는 인생 역정에 순수함이 여울져 있었다. 지금도 가끔 집에서 읽어보고 감동도 받고 성찰도 한다. 나이 7~90이 되어 처음으로 연필을 잡아 봤다는 할미들이 어려웠던 과거와 그나마 다행인 현재와 미지의 내세를 적었다. 자신이 살아온 생에 대한 고난과 이웃에 대한 애정을 그려내어 다시 볼수록 감동이 진해진다. 어른이 아닌 어린이가 쓴 동시처럼 천진난만한 느낌과 순수한 멋을 낸다.

90세 김남주 아기(?)는 '모두가 꽃이야'라는 시를 썼다. "모두 다 꽃이야. 산에 피어도 들에 피어도 모두 다 꽃이야.//아무 데나 피어도 꽃이고 이름 없이 피어도 꽃이야. // 봄에 피어도 꽃이야 여름에 피어도 꽃이고 몰래 피어도 꽃이고 모두 다 꽃이야." 이 시를 읽으면서 박애 정신이 깃든 '홍익인간' 이념을 떠올렸다. '아무 데서나 피어도' 꽃처럼 아름답고 '몰래 피어도 예쁘니 무슨 꽃이든 꽃은 모두 꽃처럼 대우'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바닷가 마을에서 세상 이치를 관조하지도 못하고 부엌데기로 고생만 한 할머니께서 이토록 마음 씀이 크니 어찌 아니 놀라운가? 사람은 모두 사람 대우를 받아야 하는데, 돼먹지 못한 셀럽 의식이 곳곳으로 번져가며 간질간질해진 우리 사회가 귀담아야 할 말이 아닐까?

엊그제 새벽, 신문을 집어 들자 1면에 수줍은 웃음을 웃는 여성의 대형 사진과 함께 아시아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뉴스를 보고 깜짝했다. 이 땅에서 한국인 모두가 축복받을 상쾌한 장면으로 몇 번 겪어보지 못한 설렘이다. 올해 노벨상으로 한강 작가가 선정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고 하지만, 세계 유수의 언론이 한강에게 보낸 평가를 종합해 보면 아픈 이들의 상처를 공감하며 함께 치유하려 다짐한다는 이야기다. 스웨덴 한림원은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생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 했는데, 인간 세상에서 사람보다 더 중요한 무엇이 어디 있겠는가?

만약 '모두가 꽃이야' 시를 지은 '김남주 아기'가 일찍이 글을 배우고 세상을 읽기 시작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서민들의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아픔을 어루만지려 노력한 네루다(P. Neruda) 같은 불세출의 시인이 되었을지 모른다. 작가 한강도 개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세상이 잘못되어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하는 아픔들을 공감하고 치유해 보려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모두 꽃이 되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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