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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6 (수)

[이수준의 부동산수첩] 폴 볼커의 통화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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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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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행의 역할은 파티가 한창일 때 술통을 치우는 것이다."

악명을 감수한 원칙주의자로 불리는 폴 볼커(Paul Volcker)는 과거 미국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으로서 1970~80년대 내내 미국을 괴롭히던 고물가 인플레이션을 잡아낸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미국은 소련과의 냉전, 베트남 전쟁 비용에 오일쇼크까지 겹치자 이를 충당하기 위해 달러를 찍어냈다. 유럽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기축통화로써 달러의 가치하락에 크게 반발했지만, 미국은 우선 내수 경제가 급했다. 결국 달러를 금에 연동하여 그 발행량을 제한하던 금본위제를 폐지하면서까지 돈을 종잇장처럼 뿌려댔고, 미국에 대한 불신은 점점 더해갔다. 이러한 위기에 소방수로 등판한 것이 폴 볼커였다.

볼커는 당시 기준금리를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20% 이상으로 올렸고, 그 여파는 엄청났다. 정리해고와 기업파산으로 실업률이 치솟았고 소비는 침체되었다. 인사권자인 대통령의 압박도 소용없었다. 농장주들은 트랙터를 동원해서 시위를 벌였으며 살해위협에 시달리던 볼커는 재임기간 동안 권총을 휴대하고 다녔다. 이러한 고통에도 혹독하게 고금리 정책을 밀어붙여 통화량을 잡아내지 않았다면, 미국은 세계 경제의 주도권을 거기서 놓아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고통스런 고금리로 미국은 정부의 개입 없이 부실기업들을 정리했고, 이후 경제가 안정기로 접어들어 1990년대의 호황기를 누리게 하는 초석이 되었다. 나아가서는 서방 경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힘든 동구권 국가들이 이탈하기 시작했고 결국 소련과의 냉전 구도에서 우위를 점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고금리의 영향은 한국에도 예외가 없었다. 미국 경제에 대한 의존도가 지금보다 더했던 당시 연준의 금리가 20%대였기에 한국의 중소 금융권의 금리가 40%를 넘어서는 일은 흔했다. 도박판에서 같은 패 한 쌍을 부르는 '땡'이라는 말에 빗대어 연 이자가 대출원금에 육박하는 '땡빚'이라는 표현도 그때 유행했다.

이렇듯 중앙정부가 각 경제활동 개체간의 약속(통화의 가치)을 명확히 규정하고 관리하면 이후 시장은 자연스러운 경쟁을 통해 스스로 성장케 하는 기조를 통화주의라고 한다. 이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자리 창출을 위해 사업을 벌여야 한다는 케인스주의와 대척점에 있다.

지금은 세계 경제가 오랜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적어도 세계 경제의 주요국들은 통화주의 정책을 통해 경제를 관리하게 되었다. 즉, 통화정책으로 금융시장을 안정시켜서, 차입자와 저축자가 거래비용을 줄이고 효율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하면 그 외의 정책은 보조적인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국내에서 현금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현금을 쥐고 있기보다는 금이든 해외주식이든 실물을 보유하는 추세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것은 아파트 시장이다. 연이은 대출 구제책으로 인한 가계부채 증가도 서울 집값을 올리는데 한몫을 했다. 부동산이 너무 오르면 그 부작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기업의 생산요소로서의 토지 조달비용이 오르면 생산비가 오르고 물가가 오르고 다시 부동산이 오르는 악순환을 어디쯤에서는 반드시 끊어내야 한다.

물가상승률이 둔화되었다고 해도 지금까지 오른 물가가 원상복구 되는 것은 아니다. 내수경기 활성화를 위해서 유동성을 완화하면 그 상당 부분이 결국 부동산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 우리 시장의 특성이다. 남의 돈을 사실상 내 돈처럼 그냥 쓸 수 있는 시대를 보내면 그 대가는 늘 모두가 함께 치루어야 했다. 다소 고통스럽지만 우리는 통화주의 시대에 적응해야 할 때이다. /이수준 로이에아시아컨설턴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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