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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7 (목)

‘서울 버전 탄호이저’, 4시간은 길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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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0일 국립오페라단 45년만의 전막 공연

연출가 요나 김, 원작과 다른 현대 정서 반영

경향신문

<탄호이저> 1막에서 붉은 슬립을 입은 여성들이 탄호이저를 둘러싸고 있다. 이는 육욕에 사로잡힌 탄호이저를 표현한다. 국립오페라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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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호이저>의 한 장면. 상단 영상에 베일을 나눠 쓴 엘리자베트와 베누스가 보인다. 국립오페라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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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를 숭상해 초기 주요 저작인 <비극의 탄생>을 헌정했다. 토마스 만은 “한 명의 사상가이자 인격체로서의 그는 수상쩍은 인물이다. 그러나 예술가로서의 그를 거부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적었다.

리하르트 바그너(1818~1883)는 19세기 독일 예술의 정점에 있는 인물이다. 대본, 음악, 무대연출을 유기적으로 융합한 ‘음악극’으로 ‘바그네리안’이라 불리는 추종자를 낳았다. 다만 그의 작품은 진지하고 분량이 길어 쉽게 접근하기 어렵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4부작 <니벨룽의 반지>는 공연 시간이 16시간 이상으로, 4일에 걸쳐 상연하곤 한다.

국립오페라단이 바그너의 <탄호이저>를 17~20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전막 공연한다. 서곡, ‘순례자의 합창’ 등 유명한 곡이 많은 데다 다른 작품에 비해 구성이 복잡하지 않고 분량도 길지 않아 바그너 세계의 ‘입문작’으로 꼽힌다. 이번 공연은 인터미션 2회를 포함해 4시간가량 이어질 예정이다. 국립오페라단이 <탄호이저> 전막을 올리는 건 1979년에 이어 두 번째다. 1979년엔 한국어 번역 공연, 이번엔 원어 공연이다.

15일 프레스 리허설은 오후 3시25분 시작해 6시간가량 이어졌다. 스태프의 휴식과 기술적 점검, 인터미션 등이 있었고, 지휘자 필립 오갱이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반복해 연습을 요구하기도 해서 시간이 늘어났다.

통상 평일 저녁 공연은 오후 7시30분 혹은 오후 8시에 시작하지만, 이번 <탄호이저>는 오후 6시30분 시작한다. 연출을 맡은 독일 만하임 국립극장 상임연출가 요나 김은 “작품이 워낙 길기 때문에 좀 잤다 해도 공연이 끝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마치 바닷가에서 잠드는 것처럼, 깨어나 보면 여전히 파도가 거기에 있다. 멋지지 않나”라고 말했다.

13세기 기사 탄호이저가 관능의 여신 베누스와 고향에 있는 순수한 여인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자신의 행실을 뉘우치고 구원받는다는 것이 원작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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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호이저>의 엘리자베트(앞)와 베누스(뒤). 카메라맨은 베누스의 표정을 잡고 있다. 국립오페라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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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호이저> 1막. 베누스에게 빠져 있던 탄호이저는 정신을 차린 뒤 고향으로 돌아가려 한다. 국립오페라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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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오페라계에서 인정받는 연출가답게 이번 <탄호이저>에는 원작과 다른 동시대 유럽의 감각이 담겼다. <탄호이저>는 드레스덴 버전(1845), 파리 버전(1861), 뮌헨 버전(1867), 빈 버전(1875) 등이 존재하는데 요나 김은 이번 <탄호이저>를 ‘서울 버전’이라 부른다. 각 버전의 장점을 가져오고 단점을 버려 새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원작에서 베누스는 1막 이후엔 거의 나오지 않지만, 이번엔 3막까지 거의 모든 장면에서 노래하지 않고도 무대를 지킨다. 무대에는 카메라맨이 등장해 공연 내내 인물들의 표정이나 사물을 촬영하고, 이는 실시간으로 무대 상단에 영사된다. 누군가 노래하며 감정을 표현하면, 이에 대한 다른 인물들의 반응을 볼 수 있다. 영상은 때로 은유성도 띤다. 1막에서 탄호이저를 유혹하는 여성들은 붉은 슬립을 입고 있지만 영상에선 흑백으로 보인다. 이 간극을 통해 육욕의 허망함 또는 욕망의 이중구조가 암시된다.

베누스와 엘리자베트는 명시적인 짝을 이룬다. 둘이 서로를 마주 보거나 함께 면사포를 쓰고 걸어가는 장면도 있다. 둘은 한 사람의 두 가지 면모, 혹은 자매나 친구처럼 보인다. 육체와 정신, 감각과 이성, 속세의 쾌락과 내세의 구원 중 바그너는 명백히 후자로 향하는 대본을 추구했지만, 요나 김은 어느 한쪽에 가중치를 두지 않는다. 오히려 엘리자베트가 죽고도 베누스는 무대에 남아 끝내 삶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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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호이저>의 한 장면. 연출 요나 김은 “합창은 독단적이고 성스러운 척하는 사회를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주 엄격하고 얌전한 블랙, 화이트 의상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국립오페라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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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에서 엘리자베트는 탄호이저의 구원을 기도하면서 죽고, 고향에 돌아와 이를 들은 탄호이저도 숨을 거둔다. 요나 김은 엘리자베트와 탄호이저가 모두 자살하는 것으로 처리했다. 드라마투르그로 참여한 이용숙 오페라 평론가는 “기도하다가 죽는다는 설정이 현대 관객에게는 맞지 않아, 이미 많은 현대의 <탄호이저> 버전이 주인공 둘 혹은 하나가 자살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한국의 초심자와 원작에 충실한 버전을 비롯해 수많은 <탄호이저>에 익숙한 유럽 관객의 감각은 다를 수밖에 없다. 19세기 전반기 바그너가 쓴 가사는 현대적 연출과 충돌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 자살한 두 사람의 뒤에서 “은총의 기적이 일어났네. 구원이 세상으로 내려왔네”라는 순례자의 합창이 쏟아지는 마지막 장면에선 어쩔 수 없는 이질감이 든다. 이 이질감 역시 작품의 재미로 여길 수 있느냐에 ‘서울 버전’ <탄호이저>를 흥미진진하게 받아들일지 여부가 달린 듯하다.

탄호이저 역에 하이코 뵈르너·다니엘 프랑크, 엘리자베트 역에 레나 쿠츠너·문수진, 베누스 역에 쥘리 로바르장드르·양송미가 출연한다. 평균 70%대 티켓 판매율을 보이고 있다. 19일 오후 3시 크노마이오페라와 네이버TV에서는 프레스 리허설과 17일 첫 공연을 편집한 버전을 볼 수 있다.

백승찬 선임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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