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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 (금)

[경제포커스] ‘HBM 실패’가 삼성에 ‘보약’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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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식 ‘파격 경영’ 되살릴 계기

IT 기업 걸맞게 이사진 개편하고

‘삼무원’ 뿌리 뽑을 인사·보상 혁신

통찰력 갖춘 경영자로 거듭나야

조선일보

삼성전자 전영현 반도체 부분장이 지난 8일 3분기 실적을 발표하면서 "시장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과로 근원적인 기술 경쟁력과 회사의 앞날에 대해서까지 걱정을 끼쳐 송구하다"는 내용의 사과문을 발표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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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반도체 역사에서 변곡점이 된 사건이 있다. 2001년 고(故) 이건희 회장과 메모리사업부장 황창규 박사의 ‘자쿠로 미팅’. 반도체 왕국 일본 도시바가 “삼성이 D램 기술을 주면 우리가 낸드 플래시 메모리 기술을 주겠다”며 합작을 제안했다. 최고경영진이 솔깃해하자, 황 박사가 급히 도쿄로 날아가 샤부샤부집 자쿠로에서 이 회장을 만났다. 황 박사가 합작 없이 독자 사업으로 가자고 했다. 이 회장은 “자신 있냐?”고 물었다. 모바일 시장이 열리면 낸드 플래시가 주력 제품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 황 박사는 “2년만 시간을 달라”고 이 회장을 설득했다. 그로부터 1년 반 뒤, 삼성은 도시바를 제치고 낸드 플래시 1위 기업이 됐다.

1987년 삼성이 4메가 D램을 개발할 때. 트랜지스터 집적도를 높이기 위해 회로를 고층으로 쌓아 올릴지(스택 방식), 아래로 파고들 것인지(트렌치 방식)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미국, 일본 기업들도 결정을 못하고 있을 때 이 회장은 “복잡한 문제일수록 단순화할 필요가 있다. 위로 올리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라면서 결단을 내렸다. 트렌치 방식을 채택한 도시바는 기술적 난관을 극복하지 못했다. 10여 년 뒤 삼성에 기술을 구걸하는 처지가 됐다.

이건희 회장이 반도체 셀 구조를 선택하거나 웨이퍼 크기를 결정할 때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술을 아는 경영자였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회장 취임 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반도체 수율을 챙겼다. 이 회장은 “선행 기업만이 이득을 챙길 수 있는 반도체 산업의 특성상 2등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강조했다. 삼성전자는 이런 철학을 바탕으로 기술력을 쌓고 ‘세계 최초’ 기록을 쌓아왔다.

그런데 최근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장이 3분기 실적 발표 때 “근원적 기술 경쟁력 문제로 걱정을 끼쳐 송구하다”는 사과문을 발표했다. AI(인공지능) 반도체에 필수적인 고대역폭 메모리(HBM) 반도체 경쟁에서 하이닉스에 뒤지고, 엔비디아의 품질 테스트를 1년이 넘도록 통과하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한 통렬한 반성문이었다. 삼성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나. ‘더 높은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도전 정신’과 ‘치열하게 토론·개선하는 조직 문화’를 회복하겠다는 사과문의 다짐에서 위기의 원인을 짐작해볼 수 있다. ‘자쿠로 미팅’처럼 기술을 잘 아는 오너와 도전 정신 충만한 실무팀장 조합이 있었다면 오늘의 수모는 없었을 것이다. 이건희 회장의 부재 후 삼성에서 혁신은 경시되고, 도전 정신은 무뎌졌다. ‘불확실한 수익성’을 이유로 2019년 HBM개발팀을 축소한 전략적 실책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을 것이다.

이건희 회장은 “실패는 그대로 방치해 두면 독약이 되지만, 철저히 원인을 분석하고 교훈을 찾아내면 최고의 보약이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할까. 글로벌 기술 기업에 걸맞지 않는 이사진부터 개편할 필요가 있다. 순혈 삼성맨 위주 사내 이사, 관료·금융인 중심의 사외이사로는 AI 혁명 시대에 대응하기 어렵다. 삼무원(삼성맨+공무원), 수포자(수석 승진을 포기한 자)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해이해진 조직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선 성과 평가와 보상 제도의 혁신이 시급하다. 이건희 회장이 강조했던 파격적 인센티브를 되살릴 필요가 있다. 이건희 회장은 사회·기술 변화를 포착하기 위해 앨빈 토플러 같은 세계적 석학부터 일본 기술 장인까지 두루 만나 그들의 통찰력, 암묵지를 배우려 애썼다. 그런 소통과 숙고의 결과가 S급 인재 구인 특명, 지역 전문가 육성, 월급 2배 인상, 7·4 근무제 같은 ‘파격 경영’으로 이어졌다. 삼성의 파격 경영 DNA가 다시 발현되려면 최고경영자가 인물 접촉면을 더 넓히고, 사회·기술 패러다임 변화를 포착하는 안테나를 더 높이 세울 필요가 있다.

[김홍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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