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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 (금)

북 “대한민국, 철저한 적대국”…김일성·김정일 유훈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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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헌법에 “대한민국을 철저한 적대 국가”로 규정했다고 17일 공개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해 12월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처음으로 ‘교전 중인 두 적대 국가’론을 제시했는데, 채 1년도 되지 않아 이를 최상위법에 명문화하는 작업까지 완료한 것이다. 1972년 사회주의 헌법 채택 당시 넣은 ‘민족 대단결’과 ‘조국통일’ 등의 표현을 지운 것으로 보이는데, 김정은이 한류 등 한국의 영향력을 끊어내기 위해 선대인 김일성과 김정일의 유훈인 민족·통일 개념까지 사실상 공식 폐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은 이날 관영 매체를 통해 경의·동해선 남북 연결 도로와 철도를 폭파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이는 대한민국을 철저한 적대 국가로 규제한 공화국 헌법의 요구”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앙일보

노동신문 1면 상단에 지난 12일자까지 게재됐던 ‘주체 113년’이라는 표기가 13일자부터는 사라졌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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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북한은 지난 7일부터 이틀간 진행한 최고인민회의에서 관련 개헌을 진행할 것으로 관측됐지만, 회의 결과를 전하면서도 이에 대해선 아무런 내용을 밝히지 않았다. 헌법에 “변화 발전하는 혁명의 요구”를 반영할 필요성을 제기, 관련 논의가 이뤄졌을 여지만 남겼을 뿐이다.

회의 개최일로부터 열흘이 지나 기정사실화하듯 개헌 사실을 공개하면서도 북한은 구체적 내용은 알리지 않았다. 다만 김정은이 지난 1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헌법에 있는 ‘북반부’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이라는 표현들이 이제는 삭제돼야 한다”면서 지목한 북한 사회주의 헌법 9조의 내용을 손봤을 가능성이 크다.

해당 조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북반부에서 인민 정권을 강화하고 사상, 기술, 문화의 3대 혁명을 힘있게 벌여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이룩하며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원칙에서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투쟁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북한이 적대 국가 규정 관련 헌법을 개정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며 “통일에 대한 우리 국민과 북한 주민들의 염원을 저버리는 반통일적이고 반민족적인 행위로서, 정부는 이를 강력히 규탄한다”고 말했다.

이번 개헌을 통해 육상과 해상에 새로운 경계를 긋는 등 영토 조항을 신설했는지 여부나 전쟁 시 영토 편입 규정 등이 포함됐는지도 아직은 명확지 않다. 일각에선 이런 구체적 방안에 대해서는 순차적으로 공개할 것으로 관측한다.

당장 선대 지도자의 유훈을 공식 폐기한 것만으로도 내부적으로는 파장이 클 수 있어서다. 북한이 개헌 사실을 뒤늦게 공개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수 있다. 아직 적대적 두 국가론의 개념이 빈약한 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개헌 살라미’ 전술을 통해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김정은이 남북 연결 도로 폭파 직후 개헌 사실을 공개한 것도 무인기 사태로 북한 주민의 대남 적개심이 커지고 있는 지금이 적기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오경섭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헌법 개정은 돌이킬 수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무게감이 있는 조치이기 때문에 내부적으로 간부와 주민들을 설득하는 작업을 병행하면서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52년 만에 헌법까지 뜯어고치며 남북관계 단절 의지를 보이고 있지만, 김정은 입장에서는 앞으로의 작업이 더 지난할 수 있다. 한국 드라마 등 북한 내부에서 한국 문화의 영향력이 급격하게 커지면서 젊은층을 중심으로 사상 이완 현상으로 이어지자 이를 막기 위해 남북 단절을 꺼내들었지만, 단순히 정보 차단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선대의 유훈까지 부정해야 하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이에 김정은이 자신의 권위를 강조하면서 김일성·김정일 등 선대의 위상을 흐리는 작업은 당분간 속도 조절을 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 북한은 지난 13일부터 노동신문에 김일성이 태어난 1912년을 ‘주체 1년’으로 하는 주체 연호를 표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또 다른 관영 매체인 조선중앙통신에서는 아직 주체 연호를 사용했다. 이는 북한이 지난 4월 김일성 주석의 생일 명칭을 ‘4·15’ ‘4월 명절’ ‘봄 명절’ 등으로 대체하면서도 ‘태양절’이란 기존 명칭을 제한적이지만 여전히 사용하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대목이다.

정영교·이유정 기자 chung.yeong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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