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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7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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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토막 난 불탑에서 유물이 우수수... 산시성 1700년 사찰의 비밀 [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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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황하 답사 ①푸차고진, 법문사, 오장원

편집자주

청장고원에서 발원한 황하가 장장 5,464km다. 9개 성을 거쳐 발해로 유입된다. 단순히 하나의 물줄기만이 아니라 경하(涇河)와 위하(渭河), 낙하(洛河) 등 지류도 많아 거대한 문화권을 형성한다. 황하 중상류 산시(陝西)와 간쑤(甘肅), 닝샤(寧夏)의 역사문화와 자연 풍광을 답사한다. 센양을 출발해 바오지, 톈수이, 룽시, 위중, 징타이, 중웨이, 우중, 인촨, 링우, 징볜, 옌안, 위린까지 8회에 걸쳐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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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시(陝西)와 간쑤(甘肅), 닝샤(寧夏)를 아우르는 황하 답사 지도.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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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시(陝西)성 푸펑현 법문사 진신보탑. 대지진과 폭풍우로 허불어졌을 때 부처님 손가락 진신사리를 비롯해 당나라 때부터 유물 2,500점이 발굴됐다.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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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밭 없어도 발효차 명소, 징양 푸차진


중원 고도 시안공항은 센양(咸陽)에 있다. 공항 북쪽으로 황하 지류인 경하가 흐른다. 서유기에 등장해 태종 이세민에게 목숨을 구걸한 용왕이 살았다고 한다. 잔재주 부리다 옥황상제의 사형 언도를 받는다. 약속을 어긴 이세민을 괴롭히지만 문을 지킨 두 명의 용맹한 장군이 있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소설 속 용왕의 거처인 경하가 흐르는 징양(涇陽)으로 간다. 공항에서 차량으로 30분 걸린다. 발효차로 유명한 푸차진(茯茶鎮)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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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시성 징양 푸차진 입구.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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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차진의 ‘중국 복차지도’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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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잎이 피어나는 찻주전자와 찻잔을 꾸몄다. 중국 복차지도(茯茶之都)다. 중국 차는 가공방법에 따라 크게 6가지로 분류한다. 녹차, 홍차, 청차, 황차, 백차, 흑차다. 찻잎의 발효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복차는 흑차다. 자연발효 후 공기 중 미생물과 산화된 후발효차다. 보통 검은색을 띤다. 윈난 보이차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징양에서 만든 흑차가 복차다. 벽돌처럼 만들어서 복전차(茯磚茶)라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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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 모양으로 가공한 푸차진 복전차.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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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차진 복전차 포장.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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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양에는 차나무가 없다. 명나라 시대부터 후난이나 쓰촨에서 찻잎을 가져와 제다(製茶)했다. 징양만의 독특한 방식과 자연환경이 어우러져 차를 만든다. 차 파는 가게가 아주 많다. 관부에 공급하는 관차(官茶)나 조공하는 공차(貢茶)를 생산한 흔적이 보인다. 실크로드나 차마고도를 따라 멀리 유통했다. 복날에 만드는 차라는 뜻도 있다. 약재인 복령의 효능을 지녔다고도 한다. ‘벽돌’에 묻어난 진화(金花)가 신기하다. 관돌산낭균(冠突散囊菌)이라 불리는 발효차 균주가 피운 꽃이다. 빛깔 좋은 진화가 있으면 가격이 올라간다. 차를 시음하고 구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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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차진의 차신궁.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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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건강해지는 보약을 마신 느낌이다. 기원전 3,000년부터 차를 약재로 마셨다는 신화가 있다.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 누구나 마시는 음료가 됐다. 특급이면 황실이 마셨다. 관리나 선비도 나름 수준 높은 맛을 느꼈다. 백성도 서서히 입맛을 다시며 동참했다. 차의 경전이자 백과사전인 다경(茶經)을 지어 널리 전파한 인물이 육우다. 차를 보급한 신선이자 성인으로 존경받는다. 차신궁(茶神宮) 안에 육우의 석상이 있다.

부처님 손가락 사리 모신 고찰, 푸펑 법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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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시성 푸펑 법문사 반야문.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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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하의 최대 지류인 위하가 간쑤에서 발원해 동쪽으로 흐른다. 낙동강이나 한강보다 긴 818km다. 시안을 중심으로 서쪽 바오지(寶雞)와 동쪽 웨이난(渭南)에 이르는 평원을 관중(關中)이라 한다. 서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푸펑(扶風)에 관중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 있다. 동한 시대 말기에 처음 건립된 법문사(法門寺)를 찾아간다. 불교의 본성과 지혜로운 수행을 뜻하는 반야(般若)를 적은 문이 나타난다. 으리으리한 규모로 압도한다. 1,700년 세월 때문은 아니다. 석가모니 손가락 뼈 사리가 보존돼 있기 때문이다. 대문 사이 사리탑이 손톱만 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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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사 불광대도 보리문 앞의 18나한 중 서쪽 9나한.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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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차를 타고 불광대도를 달린다. 무려 1,230m 거리이고 너비는 108m다. 사리의 불광(佛光)이 얼마나 영험한지 모르나 멀어도 너무 멀다. 걸어가는 사람도 있다. 8월 한여름이다. 무덥지만 않으면 걸을 만하다. 양쪽으로 무수히 많은 보살이 호위하고 있다. 18나한이 반반 나눠 도열해 있다. 보리문을 지나니 협시보살이 나타난다. 넓은 길을 사이에 두고 서로 응시하고 있다. 나타나고 또 나타난다. 5쌍씩 모두 10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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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사 불광대도 동쪽의 대묘상보살.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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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사 불광대도 동쪽의 보현보살.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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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사 불광대도 서쪽의 월광보살.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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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미륵삼존의 협시보살인 대묘상(大妙相)과 법원림(法苑林)을 지나친다. 문수와 보현이 다음 차례인데 법신인 비로자나불과 함께 화엄삼성이다. 석가모니와 함께 사바삼성을 구현하는 관음과 지장이 등장한다. 동방유리세계를 관장하는 약사여래를 협시하는 일광과 월광이 빛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동방삼성이자 약사삼존이다. 마지막은 서방삼성으로 아미타삼존이 좌정하고 있다. 현세의 서쪽 극락세계의 부처인 아미타불을 협시하는 관음과 대세지다. 부처의 나라에서 보살 총회가 열린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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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사 불광대도에서 바라본 합십사리탑.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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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사 합십사리탑.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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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뒤로 현대식 건축물이 보인다. 두 손을 고이 들고 합장하는 모양이다. 사리를 보관한 탑이다. 2009년에 준공된 148m 높이인 합십사리탑(合十舍利塔)이다. 합십은 손을 가슴까지 올려 열손가락을 붙이는 동작, 곧 합장이다. 타이완의 유명 건축설계사인 리주위엔의 작품이다. 세계 5번째 고층 건물인 타이베이101타워를 설계한 장본인으로 유명하다. 부처의 손가락을 위한 참으로 대단한 치장이다. 그만큼 종교의 힘이 강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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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사 성세영불도 '사리서래'.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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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광보살 옆 골목을 따라가니 벽화가 나온다. 법문사의 역사를 그린 성세영불도(盛世迎佛圖)다. 부처의 사리가 서쪽에서 왔다는 사리서래(舍利西來)가 그려져 있다. 사찰 이름은 처음에 아육왕사(阿育王寺)였다. 기원전 3세기 인도를 통일하고 불교를 적극 보급한 아소카왕을 기념했다. 아소카는 봉인됐던 부처의 수많은 사리를 세상에 유포했다. 중국에도 전해졌다. 4층 목탑을 세우고 지하에 사리를 보관했다. 수나라 문제가 법문사로 바꿨는데 화재로 기단만 남았다. 당나라 개국과 함께 목탑을 수복한 후 황실사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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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사 보광명전과 진신보탑.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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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사 보광명전의 비로자나불.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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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명전(普光明殿)이 나온다. 1939년에 세운 전각이다.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문수와 보현이 협시하고 있다. 18나한이 지키고 있고 등을 맞대고 수호장군인 위태보살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붕 뒤로 명나라 시대 세운 진신보탑(真身寶塔)이 등장한다. 목탑이 전탑으로 탈바꿈했다. 1976년 대지진의 여파로 2층 벽돌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1981년 8월 폭우와 함께 번개가 난무했다. 섬광 하나가 번쩍하더니 탑을 향했다. 탑이 파손돼 반쪽만 남았다. 칼로 쪼갠 듯 수직으로 갈라진 사진이 기록으로 남았다. 1988년 명나라 시대 모습으로 복원했다.

높이 47m인 8각 13층이다. 탑을 복원할 때 지하 궁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손가락 사리를 비롯해 당나라 시대부터 보존된 보물이 2,499건이나 출토됐다. 역사에 남을만한 발굴이었다. 반토막 난 불탑에서 세상을 놀라게 한 유물이 땅 위로 솟아올랐다. 지진이나 번개만큼 경이로운 사건이었다. 불교용품 외에도 측천무후의 자수치마를 비롯해 금은, 유리, 도자기, 비단 제품이 포함돼 있다. 영화를 누리던 당나라 시대의 반을 옮겨온 듯하다는 평가가 있다. 과장인데 그럴듯한 비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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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사 대웅보전.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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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사 대웅보전 오방불 중앙의 비로자나불.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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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사 대웅보전의 오방불 중 왼쪽 끝 동방불과 오른쪽 끝 북방불.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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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보전에 오방불(五方佛)이 좌정하고 있다. 밀종에서 비롯된 다섯 보살이다. 중앙과 동서남북을 주관한다. 방향마다 남다른 지혜가 있어 오지여래(五智如來)라 한다. 왼쪽 끝 동방불이 금강부동불이며 각성과 광명을 상징한다. 바로 옆 남방불은 보생불이며 성장과 풍요를 상징한다. 중앙은 비로자나불로 석가모니의 법신이며 진실과 본성을 상징한다. 바로 오른쪽 서방불은 무량수불인 아미타불이며 자비와 슬기를 상징한다. 오른쪽 끝 북방불은 불공성취불이며 성과와 역량을 상징한다. 본명인 산스크리트어를 번역하니 낯설고도 어렵다.

관 하나 들어갈 정도로 소박한, 치산 제갈량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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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산 오방원의 제갈량묘 입구.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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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쪽으로 60km 떨어진 치산(岐山)으로 간다. 제갈량이 북벌 당시 군대를 주둔시킨 오장원(五丈原)이 있다. 위하 남쪽에 펼쳐진 해발 750m 고원이다. 남북 4km, 동서 1.8km로 수세미처럼 길쭉하다. 제갈량은 위하를 경계로 사마의와 전투를 벌이다 과로로 병사했다. 유언에 따라 230km 남쪽 정군산(定軍山) 부근에 장사 지냈다. 산길을 지그재그로 올라 산비탈에 자리 잡은 제갈량묘로 간다. 홍등이 걸렸고 단아한 단층 건물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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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방원 제갈량묘 편액.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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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로 쓴 편액은 산시성 서기를 역임한 서예가 수퉁의 필체다. 시안 출신 서예가인 루구이가 쓴 기둥 대련이 발랄하다. 일시이표삼분정(一詩二表三分鼎)이 눈길을 끈다. 천하를 삼분하는 계책을 설파하고 북벌을 위해 두 번의 출사표를 썼다. 평소 즐겨 암송했다는 양부음(梁父吟)에서 따왔다. 춘추시대 제나라의 재상과 책사와 관련된 시다. 만고천추오장원(萬古千秋五丈原)이 대응하고 있다. 만이나 천이나 지극히 영원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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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묘의 '심외무도' 비석.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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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앞 광장에 비석이 보인다. 네모난 돌을 중심으로 몇 개를 짜맞춘 모양이 특이하다. 돌 하나에 문장 전체를 담는 중국답지 않다. 심외무도(心外無刀)라 쓰여 있다. 1993년 9월 일본 서예가인 노로 마사호가 제갈량 서거 1760년을 기념해 필체를 남기고 비석을 세웠다. 선종에 관한 역사를 기록한 오등회원(五燈會元)이 출처다. 마음 바깥에 칼이 없다는 말로 제갈량의 용병술을 존중하는 뜻이다. 뒤를 잇는 말이 심중무아(心中無我)다. 자아를 버리고 무력으로 세상과 상대하지 말라는 경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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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묘 정전의 '영명천고' 편액.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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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묘 정전의 조각상.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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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방원 제갈량묘 정전의 왕평·관흥(왼쪽)과 장포·요화 조각상.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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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괘 모양으로 만든 정자가 이어지고 정전(正殿)이 나온다. 영명천고(英明千古)가 무심한 듯 붙었다. 신중하게 이룬 대업이 천추보다 오래, 만고에 고결하다는 뜻이다. 팔과 다리에 건곤감리(乾坤坎離)를 새긴 옷을 입은 제갈량이다. 학우선(鶴羽扇)으로 몸을 가린 모습이다. 양쪽에 주군을 보위한 촉나라 장군 4명이 도열해 있다. 왼쪽에 왕평과 관흥, 오른쪽에 장포와 요화다. 관우와 장비의 두 아들이다. 대장군이자 선봉장으로 북벌의 맹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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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방원 제갈량묘의 의관총.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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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의 제갈량 무덤.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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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뒤쪽에 의관총이 있다. 정사 삼국지 제갈량전에 유언이 전해진다. 정군산 근처에 관 하나 들어갈 정도면 족하다 했다. 새로 수의를 만들지 말고 평소 입던 옷, 무덤 앞에 어떤 기물도 세울 필요 없다고 덧붙였다. 청렴하고 소박한 유학자다운 뜻일까? 후주 유선이 제갈량의 유지를 따랐다. 한나라의 복원을 평생 도모한 사상가였다.

제갈량은 정적이자 황제에 오른 유비의 혼령이 있는 수도로 가고 싶지 않았다. 북벌의 최전선이자 승리의 기억이 생생한 한중 땅에 영원히 묻히고 싶었으리라. 자그마한 의관총을 보니 한중에 있는 무덤과 비교가 된다. 의관을 보듬고 자란 풀을 매만지며 한 바퀴 돈다. 죽음을 앞둔 제갈량의 마음과 잘 어울리는 듯하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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