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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 (일)

신혼부부가 25억…누굴 위한 청약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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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는 청약 무용론


# 두 명의 자녀를 둔 40대 A씨는 최근 서울 방배동 ‘디에이치방배’ 아파트에 청약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이 아파트에 당첨된 사람의 청약 가점은 최고 79점, 최저 69점이었다. A씨 청약 가점은 69점. 4인 가구가 14년간 무주택으로 버텼을 때 얻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점수인데도 A씨는 100번대 예비 당첨자 순번을 받아들었고, 결국 차례는 돌아오지 않았다.

‘4인 가족 기준 69점이면 웬만한 아파트 청약은 된다.’

이런 공식은 이제 서울 인기 지역에서는 의미 없는 말이 됐다. 특히 수억~수십억원대 시세차익이 기대되는 강남권 청약 아파트 당첨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다. 미혼 실수요자는 가점이 모자라서, 가점을 꽉 채운 사람은 더 높은 가점에 밀려서, 특별공급 소득 요건을 충족한 신혼부부는 적은 소득으로 높은 분양가를 감당할 수 없어서 등 수많은 이유로 청약 제도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실수요자가 수두룩하다. 이런 분위기에 울분을 토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분양 시장에서는 청약 제도가 쓸모없다는 ‘청약 무용론’까지 퍼지고 있다. 실제 주택청약종합저축 가입자 수는 최근 1년 새 36만여명 줄며 인기가 시들해졌다.

한국부동산원 청약홈에 따르면 최근 청약을 진행한 서울 강남구 청담동 ‘청담르엘’은 모든 주택형에서 최소 당첨 가점이 74점을 기록했다. 5인 가구가 15년 이상 무주택을 유지해야 나올 수 있는 점수다. 전용 84㎡ B타입에서는 최고 81점짜리 가점이 나왔다. 7인 이상 가구 만점인 84점에 가까운 점수다. 전용 59㎡ A타입과 전용 84㎡ A·C타입도 최고 가점이 각각 79점에 달했다. 청담르엘 전체 평균 당첨 가점은 75.6점이다. 무주택으로 15년 이상 버틴 4인 가구는 모든 타입 청약에서 탈락했다.

청담르엘은 3.3㎡당 분양가가 평균 7209만원으로 분양가상한제 적용 단지 중 역대 최고가였다. 전용 59㎡ 기준 최대 20억1980만원, 전용 84㎡ 기준 최대 25억2020만원 선이다. 그럼에도 인근 ‘청담자이’ 전용 82㎡가 최근 32억9000만원에도 거래된 것을 고려하면 약 10억원의 시세차익이 기대된다는 전망에 청약도 인기를 끌었다.

청담르엘뿐 아니라 앞서 지난 8월까지 강남 3구(강남·서초·송파구)에서 청약을 진행한 ‘메이플자이’ ‘래미안원펜타스’ ‘래미안레벤투스’ ‘디에이치방배’ 등 4개 단지의 평균 당첨 가점은 73.1점으로 조사됐다. 최저 가점 평균은 71.9점이다. 앞서 한국부동산원이 윤재옥 국민의힘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올 7월 말 기준 서울 내 일반공급 가점제 당첨자 655명 가운데 가점이 70점 이상인 사람은 220명(33.6%)이었다. 강남 3구는 70점 이상 당첨자 비중이 83%에 달했다. 이 중에는 만점짜리 가점(84점) 당첨자도 수백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웬만한 4인 가구가 15년간 무주택 자격을 유지해 만점을 채워도 당첨이 사실상 불가하다는 사실이다. 가구별로 받을 수 있는 점수는 ▲4인 가구 69점 ▲5인 가구 74점 ▲6인 가구 79점 ▲7인 가구 이상 84점이다. 84점 만점을 받으려면 무주택 기간 15년 이상(32점), 청약통장 가입 기간 15년 이상(17점), 본인 제외 부양가족 6명 이상(35점) 등의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부양가족의 경우 부모 중 한 명이라도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면 청약 가점 대상에서 제외된다. 만점을 받기 위해서는 7명 가구원 모두가 15년 이상 무주택을 유지해야 한다는 얘기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4인 이상 가구’는 전체 가구 수의 17.6%에 그친다.

매경이코노미

서울 시내 한 은행에 붙어 있는 주택청약종합저축 관련 안내문. 높아진 분양가, 낮은 당첨 확률에 최근 청약통장 해지 건수가 급증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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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르엘 당첨 가점 최소 74점·최대 81점

15년 무주택 유지한 4인 가족도 당첨 어려워

강남 고가 주택 특별공급 ‘금수저’ 혜택 논란

부양가족이 적거나 없어 가점이 낮은 신혼부부나 사회초년생 등을 위해 ‘특별공급’ 제도가 마련돼 있지만 이 역시 현실성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신혼부부나 생애최초 특별공급은 소득과 자산이 일정 수준 이하인 사람이 대상이다. 하지만 최근 서울·수도권에는 전용 59㎡ 기준 분양가가 10억원에 달하는 단지가 수두룩하다. 소득이 낮은 순으로 당첨자를 뽑지만 소득·자산 기준을 맞출 경우 분양가를 감당할 수준의 대출 실행이 쉽지 않고, 사실상 부모에게서 자금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부유층이나 현금 부자에게 혜택이 돌아간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앞의 청담르엘 청약에서는 ‘신혼부부 특별공급’이 많았는데 당첨 선정 순위가 가장 높은 조건은 ① 7년 이내 신혼부부 중 ② 2세 미만 자녀가 있고 ③ 외벌이로 월평균 소득 100% 이하인 사람이다. 즉 ‘아이를 키우는 외벌이 신혼부부 중 소득이 700만원 이하인 사람’이다. 청담르엘은 당첨 직후 내야 할 계약금만 최대 7억원이다. 웬만한 신혼부부나 사회초년생이 감당하기 힘든 금액이다.

이런 상황이 가장 달갑지 않은 건 강남에 집을 마련하기 위해 부지런히 자산을 모아온 40~50대 실수요자도 마찬가지다. 4050세대는 현실성 없는 특별공급 물량이 너무 많다며 역차별을 호소한다. 최근 입주자 72가구를 모집한 강남구 대치동 ‘디에이치대치에델루이’는 일부 주택형(전용 59㎡ A타입·84㎡ B타입)에 일반공급보다 특별공급이 더 많아 강남 청약만 기다리던 실수요자의 빈축을 샀다. 이 아파트 전용 84㎡ 분양가가 최고 22억원 수준으로 고가인데 저소득층의 내집마련을 돕는다는 특별공급의 도입 취지가 무색하지 않냐는 주장이다. 서초구 잠원동 ‘메이플자이’도 특별공급 비중이 50%에 달했다.

청약 제도가 실효성 없다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아예 청약통장을 해지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지난 8월 말 기준 주택청약종합저축 가입자 수는 2545만7228명이다. 지난해 같은 달 2581만5885명에서 36만명가량이 이탈했다. 한 전문가는 “서울에서 십수 년 동안 자가 없이 대가족을 꾸리거나, 평균 이하 소득을 유지하면서 고가의 강남권 아파트 분양가를 감당할 수 있는 가족이 얼마나 되겠느냐”면서 “가뜩이나 고분양가에 아파트 청약의 매력이 반감됐는데 웬만한 청약통장으로는 당첨이 어렵다는 심리까지 겹쳐 해지가 늘어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상황을 의식한 듯 최근 정부는 청약통장 혜택을 늘리며 가입자 잡기에 나서는 모습이다. 기존 입주자저축(청약예·부금, 저축) 통장을 주택청약종합저축으로 전환하도록 허용하고 월 납입 인정액을 10만원 → 25만원으로 인상했다. 지난 9월에는 종합저축 금리를 현행 2~2.8%에서 2.3~3.1%까지 높였고 내년에는 연 300만원 한도의 소득 공제와 이자소득 비과세 혜택을 무주택 세대주, 배우자 등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다만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청약 무용론은 당분간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 중론이다.

또 다른 전문가는 “결혼이 필수가 아닌 선택인 시대에 출산과 부양가족 수 또는 소득만으로 당첨 우선순위를 매긴다는 것 자체가 불공정하다”며 “일정 금액 이상 고가 아파트에 대해서는 특별공급 물량을 폐지하거나, 청약 가점을 높일 수 있는 항목을 신설하는 등 대대적인 제도 개편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정다운 기자 jeong.dawoo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80호 (2024.10.16~2024.10.2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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