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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1 (월)

이슈 인공지능 시대가 열린다

'초지능'의 영역…반도체 설계하는 AI [테크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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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사람의 이해 영역 넘어선 반도체 설계

인간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도면 그리는 AI

'팹리스' 비즈니스 자동화되는 시대가 올까

공장 없이 설계도만 보유한 채, 제조 기업에 위탁생산만 맡기는 반도체 기업을 '팹리스(Fabless)'라고 합니다. 최첨단 반도체 공장을 뜻하는 '팹'이 없다는 뜻으로 붙은 이름입니다.

비록 팹리스에 공장은 없지만, 대신 이들은 일반 제조업체는 엄두도 낼 수 없는 무수한 지식재산권(IP)과 엔지니어들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이들은 TSMC, 삼성 파운드리 등 위탁생산 전문 업체들과 균형을 이뤄 반도체 생산 가격 협상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신 인공지능(AI)의 발전이 어쩌면 팹리스라는 비즈니스 모델에 지각변동을 일으킬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 두뇌를 뛰어넘는 '초지능'을 발휘하는 AI가 칩 설계 과정을 자동화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 이해 벗어난 반도체 복잡성이 곧 도용 막는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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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의 ARM 설계 기반 액시온 CPU. 이 컴퓨터 칩은 구글 산하 AI 연구업체 딥마인드의 '반도체 설계 인공지능'이 설계했다. [이미지출처=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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팹리스의 무기는 IP와 막강한 연구개발(R&D) 경쟁력에 있습니다. 만일 반도체 설계가 단순한 설계도일 뿐이었다면, 파운드리(위탁생산업체)와 팹리스의 공존은 성립할 수 없었을 겁니다. 파운드리는 팹리스 설계도를 '역공학' 해 언제든 유사 제품을 내놓을 수 있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선단 반도체의 복잡도는 이제 인간의 이해 범위를 초월할 정도로 복잡해졌습니다. 로직 칩 하나를 설계하는데 드는 작업량이 상상을 뛰어넘다 보니, 단순히 설계를 '보는' 것만으로 제품을 역공학 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즉, 반도체의 불가해성 그 자체가 팹리스엔 방패가 되는 겁니다.

이 때문에 반도체 설계는 뛰어난 반도체 엔지니어와 R&D, 그리고 '시간'을 요구하는 작업입니다. 특히 중앙처리장치(CPU) 등 복잡한 로직 칩을 만들어낼 엔지니어를 구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최고 수준의 CPU 디자인을 만들 역량을 갖춘 나라는 미국, 영국, 이스라엘 정도로 세 손가락에 꼽을 정도지요. 한국 최대의 반도체 기업 삼성전자도 텍사스 오스틴과 캘리포니아에 별도의 R&D 센터를 설립해 로직 칩을 연구했을 정도니까요.

칩 도면 그려주는 '슈퍼휴먼' AI, 인간 엔지니어 뛰어넘다

이런 반도체 디자인을 조금이라도 자동화하는 게 가능할까요? 최근 구글 산하 AI 연구소인 '딥마인드'는 '알파칩(AlphaChip)'이라는 새로운 AI 모델을 내놨습니다. 알파칩은 세계 최초의 '칩 디자인하는 AI'입니다. 딥마인드가 이전에 내놓은 알파고나 제미나이 등 여러 AI 모델처럼 딥러닝과 강화학습을 혼합한 모델이며, 다른 데이터를 학습해 더욱 성능을 개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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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의 반도체 설계 AI 알파칩이 반도체 '배치 & 라우팅' 작업을 수행하는 모습. 블록 단위의 소자 배열을 효율화해 반도체의 밀집도를 높이는 설계 프로세스다. [이미지출처=구글]


놀랍게도 알파칩은 이미 구글 사내에서 쓰는 칩을 제조할 때 쓰이고 있습니다. 현재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유닛(GPU)의 대항마로 손꼽히는 구글 AI 가속기 'TPU'의 설계엔 알파칩이 가담했습니다. 또 구글의 자체 CPU인 액시온(Axion)도 이 AI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습니다. 액시온은 ARM의 서버용 CPU인 '네오버스' 코어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칩인데, 이미 ARM의 자동화 디자인 툴인 컴퓨트섭시스템(CSS)을 활용합니다.

즉, 구글의 반도체 설계 과정은 이전의 다른 반도체 디자인과는 달리 다양한 자동화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았다는 겁니다. 거대 IT 기업이지만 반도체와는 그리 접점이 없었던 구글이 이토록 빨리 자체 칩 디자인 팀을 설립할 수 있었던 비결도 여기에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도, 딥마인드는 알파칩의 설계 최적화 기능인 '슈퍼휴먼 레이아웃(Superhuman layout)'이 이미 숙련된 인간 엔지니어를 뛰어넘는 실적을 냈다고 공표했습니다. 슈퍼휴먼 레이아웃이 자동화한 구간은 칩 설계 중에서도 '배치와 라우팅(Placement & Routing·P&R)'인데, 이 공정은 각 반도체 소자를 연결하는 선(와이어)을 배치해 설계 도면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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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마인드의 하드웨어 두뇌인 TPU 데이터센터. TPU의 디자인도 알파칩이 수행한다. [이미지출처=딥마인드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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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대 TPU인 '트릴리움'의 경우 알파칩은 인간 전문가보다 전체 와이어 길이를 6.2% 덜 쓰고도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길이가 줄었다는 건 그만큼 소자 사이의 빈 공간이 없다는 뜻이며, 이는 한 칩 안에 들어가는 소자의 양이 늘어 더욱 강하고 효율적인 칩이 설계된다는 뜻입니다. 무엇보다도 알파칩의 P&R 실력은 갈수록 인간과의 격차를 늘려나가고 있습니다. 지금의 추이대로면 머지않아 알파칩의 P&R 효율성은 인간을 10% 격차로 따돌릴 겁니다.

AI가 곧 팹리스 되는 미래 올까

레이아웃은 칩 설계 과정의 극히 일부일 뿐이며, 아직 자동화가 인간 GPU·CPU 엔지니어를 완전히 대체할 날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AI 엔지니어의 실력이 빠른 속도로 증진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실제 상용화 제품의 설계에 AI가 쓰이고 있다는 건 중요합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그동안 팹리스들은 막대한 R&D와 시간, 엔지니어 인력을 들여 칩을 만들어 왔습니다. 만일 칩 디자인의 상당 부분이 자동화돼 필요 인력이 줄어든다면, 그만큼 한 기업이 팹리스가 되기 위해 넘어야 할 장벽도 낮아지는 겁니다. 또 최신 세대 컴퓨터 칩을 만드는 데 드는 시간도 줄어들 겁니다.

물론 이런 변화가 현실화한다고 해도 팹리스들의 시장 지배력이 줄지는 않을 겁니다. 대신, 우리의 이해를 완전히 벗어난 미래 반도체를 만들 '슈퍼휴먼 AI'를 누가 소유했느냐에 따라 업계의 승패가 갈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임주형 기자 skepped@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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