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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7 (수)

이슈 법의 심판대 오른 MB

대기업 CEO·6선 의원…'MB 형님' 이상득, 영욕의 정치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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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금융개혁 주도·천막당사 운영 등으로 '미스터 위기관리' 별명

MB정부 '실세' 불리다 정권 후반기 비리혐의 수감

연합뉴스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 별세
(서울=연합뉴스)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이 23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9세. 2024.10.23 [유족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photo@yna.co.kr


(서울=연합뉴스) 류미나 기자 = 구순(九旬)을 앞두고 23일 타계한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은 정치권과 경제계에서 모두 굵직한 족적을 남기며 현대사의 흐름에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6선 중진 국회의원을 지내는 동안 국회부의장을 비롯한 주요 국회직과 당직들을 거쳤고, 무엇보다 동생인 이명박(MB) 전 대통령이 대권을 잡는 과정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후견인으로 평가된다.

기업인으로서도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를 지내며 당시 우리나라의 주력 산업이었던 섬유업계의 발전 기틀을 다진 전문경영인으로 기억된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청년기에 고학하고 평사원으로 대기업에 입사해 CEO까지 오른 입지전적 성공담 덕에 동생인 이 전 대통령과 함께 '샐러리맨 신화', '흙수저 신화'를 쓴 대표적 인물로 남아 있다.

경북 영일 출신인 고인은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뒤 1961년 코오롱 1기 공채사원으로 입사해 코오롱·코오롱상사 대표이사직까지 올랐다.

1988년 13대 국회 때 코오롱상사를 떠나 민정당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고, 이후 2008년 18대 국회까지 내리 6선 배지를 달며 당과 국회의 주요 보직을 두루 거쳤다.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당시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으로 금융개혁을 주도하며 '미스터 위기관리'라는 별명을 얻었고,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시절인 2004년 당 사무총장을 맡아 천막당사 이전 등 난제들을 처리하며 자신의 별명을 세간에 거듭 부각했다. 당시는 이른바 '차떼기' 후폭풍과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 속에서 당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던 상황이었다.

서울시장으로 재임하다 2006년 퇴임한 동생 이 전 대통령의 대권 도전을 정치권에서 뒷받침한 주역도 이 전 부의장이다.

당시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은 '박근혜당'이라고 불릴 정도로 당내 의원들의 세력 구도가 일방적이었지만, 이 전 부의장은 특유의 정치력과 친화력을 앞세워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 당내 권력 지형을 친이(친이명박)-친박(친박근혜)이 대등하게 맞서는 구조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2007년 대선에서 이 전 대통령을 당선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후견 그룹 '6인회'를 사실상 조직하고 이끌기도 했다.

이처럼 이명박 정부의 일등 창업공신인데다 대통령도 어려워하는 친형이면서 6선 중진의 정치적 무게를 지닌 이 전 부의장은 당시 자타가 공인하는 '정권의 제2인자'로 꼽혔다. 모든 일은 형님으로 통한다는 뜻의 '만사형통(萬事兄通)', 고향 이름을 딴 '영일대군' 등 여러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국회에서도 이 전 의원의 지역구인 포항에 SOC(사회간접자본) 예산이 집중적으로 배정되며 '형님예산'이라는 신조어가 생기는 등 권력의 핵심 실세라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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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득 전 국회부의장 별세
(서울=연합뉴스)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이 23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9세. 이 전 부의장은 서울대병원에서 입원 치료 중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장례식장은 서울아산병원. 사진은 동생인 이명박 전 대통령과 지난 2011년 청와대에서 함께 이동하는 이상득 전 부의장. 2024.10.23 [연합뉴스 자료사진] hihong@yna.co.kr



하지만 그런 만큼 견제도 집중돼 이명박 정부 5년 내내 이전 정부 때보다 오히려 힘들고 어려운 정치 행보를 걸었다.

MB 집권 2년 차인 2008년 18대 총선에 앞서 불출마를 요구하는 이른바 당내 소장·쇄신파 주도의 '55인 파동'이라는 곡절을 거쳐 어렵게 6선 고지에 올랐지만, 이후에도 끊임없이 여권 내 권력투쟁 논란의 중심에 서면서 결국 2009년 6월 '정치 2선 후퇴'를 선언해야 했다.

이후엔 한동안 남미와 아프리카 등 오지를 오가며 자원외교에 주력했다. 고인은 지난 2011년 출간한 '자원을 경영하라'에서 이 시기에 대해 "대통령 특사로 남미와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등 12개국을 방문했으며, 각국 정상과 면담을 21차례나 했다" 밝힌 바 있다. 2010년 국가정보원 직원 추방사건으로 촉발된 리비아와의 외교 갈등 해결에 나섰던 일, 리튬 개발 협의를 위해 볼리비아를 다섯 차례나 방문한 일 등을 핵심 성과로 꼽았다.

하지만 2011년 보좌관이 SLS그룹 구명 로비 명목으로 수억원대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면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듬해 19대 총선에 불출마한 이 전 부의장은 저축은행으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기소돼 1년 2개월의 수감 생활을 했다. 이는 헌정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의 친형이 구속된 사례로 남았다.

이후 2015년 포스코의 민원을 해결해주는 대가로 특혜성 뇌물을 챙긴 혐의로 다시 기소됐다. 2019년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되며 1년 3개월의 실형을 살고 2020년 8월 만기 출소했다.

고인은 최근 지병으로 서울대병원에서 입원 치료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minary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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