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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4 (목)

의문사 ‘푸틴 정적’ 나발니 회고록 펴낸 아내 “남편, 죽음 각오하고 러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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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러시아어 등 11개 국어로 발간돼...배우자 나발나야 “남편 죽음 알면서도 러시아에 있길 원했다”

조선일보

지난 2월 숨진 러시아 반정부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의 배우자 율리아 나발나야는 최근 “남편의 대의를 잇겠다”며 EU(유럽연합) 등 국제기구에서 러시아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생전의 나발니에게서 받은 일기와 쪽지들을 모아 22일 그의 회고록도 출간했다./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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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옥사한 러시아 반(反)정부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의 회고록 ‘패트리어트’(애국자)가 22일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출간됐다. 생전의 글을 엮은 약 500페이지짜리 회고록에는 목숨을 걸고 러시아 정부에 맞섰던 ‘푸틴의 정적(政敵)’으로서 사명감뿐 아니라 가족과 떨어져 고초를 겪는 개인의 고통까지 생생히 담겼다. 2020년 러시아 국내선 비행기에서 독극물(노비촉) 중독 증세로 쓰러진 나발니는 독일에서 치료를 받은 뒤 이듬해 러시아로 되돌아갔다가 체포돼 수감 생활을 하던 중 숨졌다.

워싱턴포스트 등에 따르면 이 책은 초판 50만부가 미 크노프 출판사에서 영어·프랑스어·독일어 등 11국 언어로 출간됐다. 러시아어판은 폴란드 등 일부 국가에 종이책으로 풀렸지만 러시아에서는 아마존 등을 통해 전자책으로만 읽을 수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출판사 측은 “책이 러시아 세관을 통과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어 러시아 내 정식 출간은 불투명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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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발간된 알렉세이 나발니의 회고록 '패트리어트(애국자)'가 미국 뉴욕의 한 서점 매대에 진열된 모습. /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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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은 마치 그가 죽음에서 살아 돌아와 집필한 듯 “죽는 것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는 과거형 문장으로 시작한다. 생전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후 어린 시절부터 전(全) 생애를 담았다. 그는 “내 자서전은 화학무기를 이용한 암살 시도를 폭로하는 박진감 있는 스릴러 장르로 쓸 생각이었는데, 옥중 일기로 바뀐 것이 한탄스럽다”며 “만약 그들이 마침내 나를 제거하면 자서전이 아닌 추모 기록이 될 것”이라는 씁쓸한 유머도 담았다.

교도소에서 처참한 생활을 하며 죽음을 예감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기록됐다. 나발니는 투옥 후 1년여가 지난 2022년 3월 일기에 “남은 생을 감옥에서 보낼 것 같다. 손주를 보지 못하고 죽을 운명”이라면서 “그래도 거짓말쟁이, 도둑, 위선자 무리가 조국을 약탈하도록 둘 수 없다”며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그 정권을 비판했다. 마지막 일기는 2022년 9월 2일 자다.

편지와 변호인을 통해 전한 이야기도 포함됐다. 사망 전 1년여간 독방에 갇혀 있던 그는 지난해 8월 고통스러운 수감 생활을 전했다. “너무 더워서 숨을 쉬기가 힘들다. 땅바닥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신선한 공기를 갈구하고 있다. 고문당하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를 가리기 위한 시끄러운 음악이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나발니는 회고록 저술을 계속하려고 했지만 교도소 측이 점차 강하게 제지하다가 결국 하루에 30분만 종이와 펜을 쓰게 했다는 내용도 나온다.

나발니가 생명의 위협을 각오하고 ‘정적’ 푸틴이 있는 고국에 제 발로 돌아간 이유도 엿볼 수 있다. “왜 돌아왔느냐고 교도관과 동료 수감자들이 물었을 때 나는 신념에 의미가 있으려면 희생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 답했다.” 배우자 율리아 나발나야는 프랑스 르피가로와의 출간 기념 인터뷰에서 “위험이 뒤따른다는 걸 알았지만 남편은 감옥에 갇히더라도 사랑하는 이들이 있는 러시아 안에서 러시아를 바꾸길 원했다”고 말했다.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나발나야의 노력이 컸다. 나발니가 독극물 중독 후유증으로 독일 병원에서 치료받으며 쓴 일기를 잊지 않고 보관했고, 교도소의 검열을 통과해 가까스로 전달받은 짧은 편지들을 조각조각 모았다. 회고록 출간은 나발니의 뜻이기도 했다. 그는 편지에서 가족에게 “만약 내가 제거된다면 (회고록을 발간해서) 인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일부 내용은 대변인 키라 야미시가 쓰고 나발니가 승인했다.

나발니 사후 해외에 거주 중인 나발나야는 남편의 뜻을 이어 올 초 EU(유럽연합)에서 연설하는 등 반푸틴 운동의 구심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회고록 출간을 맞아 서방 매체와 연달아 인터뷰한 그는 21일 영국 BBC에 “푸틴은 내 남편의 죽음과 살인에 책임을 져야 한다”며 “푸틴이 사라지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의사가 있다”는 뜻을 밝혔다. 나발나야 역시 현재 극단주의 조직 가담 혐의로 러시아 당국의 수배 명단에 올라 있다.

나발니는 러시아 정부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푸틴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비리와 부패를 고발했던 인물이다. 변호사 출신으로 2011년부터 ‘반부패 재단’을 만들어 활동했고 여러 차례 반정부 시위를 주도했다. 독일에서 귀국한 뒤 극단주의 조직 활동, 기부금 횡령, 법정 모독 등 혐의로 총 30년의 징역을 선고받고 수감 생활을 하던 중 지난 2월 옥중에서 급사했다. 사망 전날까지 건강에 이상이 없었던 모습이 영상으로 공개되면서 그의 죽음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가 사인을 ‘돌연사 증후군’이라고 밝히면서 그 전말은 사실상 미스터리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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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휘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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