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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토)

[지평선] 지각 단풍의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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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한국일보

22일 대구 북구 경북대학교 캠퍼스에서 한 학생이 노랗게 물들어가는 은행나무 옆으로 우산을 든 채 걸어가고 있다. 대구=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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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은 나무가 월동 준비에 들어갔다는 신호다. 나무가 한해살이풀과 달리 여러 해를 살아남으려면 겨울에 죽지 않는 게 중요하다. 이를 위한 고육책이 바로 나뭇잎을 모두 떨어뜨리고 몸집을 줄이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뿌리에서 나뭇잎까지 계속 물을 공급하다 보면 갑자기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을 때 나무 전체가 얼어 죽을 수도 있다. 이를 위해 나무는 가을이 되면 가지와 잎 사이에 떨켜층을 형성, 물 공급을 차단한다. 이렇게 되면 나뭇잎이 햇빛을 받아 만들어낸 탄수화물이 더 이상 줄기로 가지 못하고 쌓인다. 광합성이 중단되고 엽록소도 파괴된다. 초록색을 띠던 엽록소가 사라지면 그동안 엽록소에 가려져 있었던 카로틴 색소가 드러나 노랗게 보이게 된다. 일부는 안토시아닌처럼 새롭게 생성된 색소로 빨간색도 띤다. 이게 바로 단풍이다. 떨켜에서 잎이 떨어지면 낙엽이다.

□ 붉은 단풍에 대해선 진화론과 생존 전략 차원에서 설명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나무들이 진딧물로부터 수액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곤충들이 싫어하는 붉은 색소를 만들어낸다는 주장이다. 독성이 있는 단풍잎을 떨어뜨려 주변에선 다른 종류의 식물이 자라지 못하도록 한다는 이론도 주목된다. 이 정도면 단풍은 화려한 불꽃이 아니라 처절한 몸부림에 가깝다.

□ 단풍이 들려면 일단 기온이 떨어져야 한다. 그런데 올해는 가을 폭염까지 이어지는 등 기후 위기로 단풍도 늦어지고 있다. 역대급 지각 단풍으로, 9월 말이면 물들기 시작했던 설악산도 천불동계곡은 이제서야 절정이다. 그동안 무더위에 시달려온 나무들은 지금도 계절이 헷갈려 단풍의 전단계인 떨켜층을 언제 형성해야 할지 스트레스가 극심하다. 인간의 오만과 이기심은 나무들의 생태 시계와 섭리까지 망가트려 놨다.

□ 올해 단풍은 늦어진 만큼 순식간에 끝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기온이 서서히 내려가야 색채가 고운데 그렇지도 못한 상황이다. 그래도 조물주가 한껏 뽐낸 울긋불긋 그림 솜씨를 즐기지 않을 이유는 없다. 감사한 마음으로 감상하면 된다. 기상청 사이트에선 단풍 현황도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이 자연 앞에 더 겸손해지지 않는다면 나중엔 이런 지각 단풍마저 볼 수 없을지 모른다.

박일근 논설위원 ik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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