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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토)

취미 강좌부터 사교-맞선까지… 은행권, 고액 자산가 유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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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 리포트] 자산가 대상 은행 PB 서비스의 진화

‘영 리치’ 등 자산가층 두터워지며… PB 서비스가 미래 수익처로 부상

전국 센터 85곳, 6년새 13% 증가… 자산 증식-가업 승계 등 종합 관리

인맥 만드는 ‘사랑방’ 역할도 자처… 생애 전반 케어 서비스로 확대

동아일보

16일 오후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포스코센터 서관에서 신한은행 고객들이 은행 측이 준비한 가죽공예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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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하는 ‘새들 스치티’는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에서 쓰는 바느질 방식입니다. 갖고 계신 제품과 비교해 보면 비슷한 걸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16일 오후 2시, 수강생 5명이 가죽공예를 배우기 위해 서울 강남구 신한 프리미어 PIB 강남센터에 모였다. 이곳은 공방이 아닌 은행이다. 금융자산 100억 원 이상 초고액 자산가에게 프라이빗뱅킹(PB)과 투자은행(IB)이 결합된 자산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특징이다.

수강생들은 저마다 원하는 색의 가죽을 골라 광을 내고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시작했다. 바늘 2개를 사용하는 생소한 방식에 강사에게 질문이 쏟아졌다. 2시간여 만에 카드 지갑이 완성되자 “예쁘다” “제일 소중한 카드를 넣어야겠다”는 만족스러운 반응이 나왔다. 친구와 함께 강의에 참가한 이모 씨(52)는 “은행에서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니 편하다”며 “기회가 될 때마다 참여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 하나은행은 18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 ‘하트원’에서 PB센터 고객을 대상으로 미술과 음악을 결합한 예술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오후 6시경부터 개방된 전시 공간에는 이날 공연되는 ‘도시산조: 서울’과 어울리는 하나은행 소장 미술품 35점이 전시돼 있었다.

비가 오는 궂은 날씨였지만 고객 30여 명이 이곳을 찾아 작품을 소개하는 도슨트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작품과 사진을 찍거나 일행과 감상을 공유하기도 했다. 이어진 70분간의 공연에서도 관객들은 연주자의 얼굴을 집중해 살피거나 음악에 맞춰 고개를 흔들며 호응했다.

하나은행 하트원은 문화 공간이면서 개방형 수장고로, 3층에는 VIP 고객들을 위한 수장고가 따로 마련돼 있다. 고객들은 보안시스템을 갖춘 전용 공간에 미술품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별도의 감상 공간을 통해 원할 때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

시중은행이 고액 자산가를 대상으로 한 PB 서비스를 미래 성장동력으로 삼고 뜨거운 경쟁을 벌이고 있다. 새로운 수익처 발굴에 분주한 은행들이 고액 자산가 PB 서비스에 ‘미래’가 있다고 내다본 것. 수십억 원, 많게는 수백억 원의 자산을 가진 초고액 자산가를 겨냥한 프리미엄 PB 브랜드를 내놓을 뿐만 아니라 자녀들의 만남, ‘영리치’를 위한 강연 모임과 네트워킹을 주선하는 등 부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비금융 서비스를 확대하고 있다.

● 초고액 자산가 위한 ‘종합 자산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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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권에 따르면 9월 말 기준 KB국민, 신한, 하나, 우리 등 4대 시중은행의 고액 자산가 전용 PB센터는 85개로, 2018년 말(75개) 대비 13.3% 증가했다. 같은 기간 국내 영업점 수가 3564개에서 2791개로 21.7% 줄어든 것과 대조적인 흐름이다.

4대 은행은 3억∼10억 원 이상의 금융자산을 보유한 부유층을 PB센터 고객으로 삼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초고액 자산가를 고객으로 하는 PB센터를 브랜드화해 운영하는 추세다. KB국민은행은 2022년 8월 금융자산 30억 원 이상의 초고액 자산가 전용 프리미엄 PB 브랜드 ‘KB 골드앤와이즈 더퍼스트’를 신설했다. 신한은행 역시 금융자산 10억 원 이상 고액 자산가를 위한 신한 프리미어 PWM 외에 100억 원 이상 초고액 자산가 대상 신한 프리미어 PIB 및 프리미어 패밀리오피스를 운영하고 있다.

하나은행은 금융자산 5억 원 이상 고액 자산가를 대상으로 하는 ‘골드 클럽’ 중에서도 초고액 자산가는 ‘클럽원’이라는 최상위 PB 채널을 통해 관리한다. 30억 원 이상의 금융자산을 보유한 고객이 여기에 해당한다. 최근 적극적으로 PB 서비스를 확대하고 있는 우리은행의 경우 자산관리 기준은 금융자산 10억 원으로 동일하지만 거점 지역을 중심으로 운영하는 ‘투체어스 W’와 특화된 영역을 관리하는 ‘투체어스 익스클루시브’를 두고 있다.

은행들은 초고액 자산가를 위해 ‘패밀리 오피스’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고객 개인의 금융자산뿐만 아니라 가족, 회사 등의 자산까지 종합적으로 관리한다. 자산 증식, 가업 승계, 상속 등을 한꺼번에 처리해주며 단순한 재무컨설팅을 떠나 자산관리를 위한 ‘큰 그림’을 그려주는 셈이다.

PB센터의 위치에 따라 고객들의 금융 서비스 수요도 달라진다. 한 시중은행 프라이빗뱅커(PB)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경우 오래 거주한 고액 자산가 비중이 높아 상속, 증여에 대한 상담이 많다”며 “도곡동은 기업가 고객이나 법인 거래처가 많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 고급 공간에서 취미 생활-인맥 형성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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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들은 고액 자산가를 끌어모으기 위해 PB센터를 대형화·고급화하고 있다. 실제로 진화를 거듭한 PB센터는 단순히 자산관리 서비스 센터를 넘어 자산가들의 커뮤니티, 일종의 ‘사랑방’ 역할까지 하고 있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KB 골드앤와이즈 더퍼스트 1호점 규모는 지상 7층, 지하 2층에 달한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하나은행 클럽원 PB센터는 문어의 빨판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외관을 갖고 있다. 내부는 ‘블랙 룸’ ‘샤또 룸’ 등 상담실마다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 특징이다. 벽면에는 분위기에 맞는 고가의 찻잔이나 그림을 배치했다. 은행 업무 공간뿐만 아니라 독서 공간, 최고급 스피커가 있는 음악 감상실, 고객들을 위한 와인 수장고도 별도로 마련돼 있다. 고객들은 은행 업무가 목적이 아니더라도 공간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PB센터에서는 다양한 비금융 서비스도 운영되고 있다. 음악·미술 감상이나 취미 강좌 등 문화 체험 서비스가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 고객들 간의 커뮤니티 형성이 PB센터의 주요 역할 중 하나다. 신한은행은 올 4월부터 11월까지 미래 경영인 및 1984년 이후 출생 우수 고객 25명을 대상으로 ‘신한 넥스트 리더스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경영 전략, 승계 등 금융부터 와인, 이미지 메이킹 등 비금융 분야에 대한 강연이 매달 진행된다.

또 다른 시중은행 PB는 “‘영 리치(young rich)’들은 단순히 자산관리를 잘하는 금융회사를 선택하기보다 자신의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사업 기회를 발굴할 수 있는 비금융 서비스를 중요하게 평가한다”며 “은행의 자산관리 서비스가 생애 전반에 걸친 ‘라이프 케어’로 변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래 고객인 고액 자산가의 자녀들을 위한 만남 프로그램도 진행되고 있다. 하나은행이 20여 년째 열고 있는 고액 자산가 대상 자녀 만남 주선 행사의 경우 자녀들 간의 사교 모임으로 발전하거나 결혼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우리은행은 올 9월 결혼정보업체 가연결혼정보와 전략적 업무 협약을 체결하고 투체어스 익스클루시브 등급 고객 본인 또는 자녀 100명에 관련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 창업, 가상자산 투자 등으로 ‘영리치’ 대거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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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들이 이토록 고액 자산가에게 공을 들이는 이유는 자산관리 서비스가 차세대 ‘수익처’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이자 이익 의존도를 낮추고 수익 구조를 다각화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산관리 서비스는 수수료를 통해 효과적으로 비이자 이익을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이다. 고객의 자산이 증가하는 만큼 은행의 이익도 늘어나 양쪽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사업 형태이기도 하다.

갈수록 자산가층도 두꺼워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가 발표한 ‘2023 한국 부자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금융자산 10억 원 이상을 보유한 부자는 45만6000명으로, 전년(42만4000명) 대비 7.5% 증가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전인 2019년(32만3000명)과 비교하면 40% 넘게 늘어났다. 창업이나 주식, 가상자산 투자 등으로 ‘영 리치’가 대거 탄생한 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한국 전체 인구의 0.89%에 불과한 이들이 보유한 금융자산(2747조 원)은 한국 전체 가계의 총 금융자산(4652조 원)의 59%에 달한다.

게다가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가 본격적으로 은퇴 연령에 접어들면서 노후 생활 자금뿐만 아니라 증여·상속, 세무 등 종합적인 자산관리의 필요성이 커졌다.

실제로 하나은행 패밀리오피스센터의 관리 자산은 2022년 말 3300억 원(9개 가문)에서 올 6월 말 1조3000억 원(72개 가문)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자산 규모 100억 원 이상이라는 높은 가입 조건에도 불구하고 초고액 자산가들의 자산관리 수요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KB 골드앤와이즈 더퍼스트도 개설 이후 7개월 만에 고객 수와 관리 자산이 약 2배로 증가했다.

전 세계적으로도 패밀리 오피스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 딜로이트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8030개의 싱글 패밀리 오피스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2019년(6130개)보다 약 31% 늘어났고 2025년 9030개, 2030년 1만720개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패밀리 오피스의 운용 자산(AUM) 역시 올해 3조1000억 달러(약 4285조 원)에서 2030년 5조4000억 달러(약 7464조 원)로 불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은행권도 자산관리 서비스 확대에 더욱 속도를 내겠다는 구상이다. 우리은행은 2024년을 ‘자산관리 전문은행’ 도약의 원년으로 삼고 자산관리 특화 점포를 2026년까지 20곳으로 늘리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또 PB를 비롯해 부동산, 세무 전문가 등을 영입하고 있다. KB국민은행 역시 올해 안에 도곡스타PB센터를 골드앤와이즈 더퍼스트 3호점으로 개편할 계획이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은행이 예대마진이 아닌 수익원을 모색하는 흐름은 긍정적”이라며 “한국은 세율이 높아 상속·증여 등의 자문 수요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다.

김수연 기자 sy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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