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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토)

[법원취재썰]'모두의 1층 소송' 전합 공개변론…"우리도 부족했다" 먼저 고친 대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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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았던 것들

하나씩 고쳐나가기 위한 대법원의 움직임

임시 휠체어석?리프트?장애인 화장실

공개변론만큼 중요한 대법원의 '실천'

지난 23일, 대법원 대법정에 못 보던 사각형 표시 11개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위로 휠체어 바퀴가 멈춰섰습니다. 장애인 접근권 관련 공개변론(주심 이숙연 대법관)을 지켜보기 위해 법원을 찾은 시민들이었습니다. 대법원은 이 날 장애인 접근권 관련 시행령을 제 때 개정하지 않은 국가의 책임을 따져보기에 앞서, 법원에 남아있던 차별부터 고쳐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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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대법정에는 휠체어석 11자리가 마련됐습니다. 〈사진=JTBC 보도영상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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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석에 달하는 대법정, 휠체어를 탄 방청객을 위해 만들어진 자리는 원래 최대 3석에 불과했습니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방청객은 대법정으로 가는 길도 험난했습니다. 대법원 건물에 도착해 대법정까지 휠체어로 이동하려면 돌고 돌아 10분 정도가 걸렸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새로운 휠체어 리프트를 설치해 출입구부터 법정까지 1분 안에 도착할 수 있도록 동선도 바꿨습니다. 수개월 전부터 장애인 화장실을 늘리기 위한 공사도 진행해 공개변론 즈음에 맞춰 마무리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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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은 휠체어 이용 방청객들의 동선 효율성 확보를 위해 새 휠체어 리프트를 마련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이용이 번거롭고 위험성이 있는 휠체어 리프트는 장기적으로 경사로 등의 편의시설로 대체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많습니다. 〈사진=JTBC 보도영상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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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관계자는 "접근 편의성 부분에서 저희도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며 "공개변론까지 하는데 저희가 잘못해서는 안되겠다 싶어 이번 기회에 많이 보완했다"고 밝혔습니다. 또 기존에는 선착순으로 부여하던 방청 기회를 장애인 방청객들을 고려해 사전 추첨제도로 바꿨다고 합니다. 대법원 관계자는 "전시행정처럼 다시 원상태로 되돌리려는 것은 절대 아니고, 앞으로 더 노력하겠다는 마음"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접근권을 높이기 위한 고민이 곳곳에 스며든 대법정. 휠체어 장애인인 원고들과 국가, 그리고 13명의 대법관이 모여 앉았습니다. 3년 여 만의 전원합의체 공개변론입니다. 소송의 쟁점은 휠체어를 가로막는 '문턱'을 없애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한 국가의 행위가 위법한지, 또 그렇다면 당사자들에게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있는지 여부입니다. '모두의 1층' 이라는 이름으로 2018년 시작된 소송인데, 대법원은 2022년부터 심리를 이어왔습니다.

한 뼘 문턱에 가로막힌 장애인 접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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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서초동 일대의 편의점. 누군가에겐 1층이 될 수 없는 1층 출입문의 모습. 〈사진=조해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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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동 법원 근처에서 10여분을 걸어보니 편의점 세 곳을 만났습니다. 편의점 브랜드는 모두 달랐지만 문턱만큼은 똑같았습니다. 휠체어가 넘어갈 수 없는 문턱, 좀처럼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장애인 접근권을 규정한 장애인평등법과 그 시행령이 허술하기 때문입니다. 1998년 만들어진 장애인 등 평등법, 접근권 조항은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 설치 규정을 시행령에 위임하고 있습니다. 일단 법은 만들었지만, 구체적인 기준은 정부에서 만들라는 뜻입니다. 1998년엔 소규모 점포들의 사정을 고려해 90평이 넘는 점포에만 편의시설 설치 의무를 뒀습니다. 경사로 설치 비용을 부담해야하는 소상공인들을 위한, 일종의 유예 조치였습니다. 하지만 국가는 2022년까지 이 시행령을 단 한번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2018년, 휠체어 장애인들은 "법을 만들지 않은 국가의 부작위는 위법하다"며 소송을 냈습니다.

" "휠체어를 이용하고 있는 저에게 1층은 그냥 1층이 아닙니다. 편의점, 커피점, 약국, 음식점, 등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이용해야 하는 시설들이 20년 넘는 시간 동안 저에게는 출입금지구역이었습니다." -김명학/원고 당사자 "

2022년, 1심과 2심에서 모두 이 시행령이 "장애인의 행복 추구권과 접근권을 침해한다"며 위법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국가가 고의적으로 법을 방치한 건 아니라고 봤습니다. 휠체어 장애인들이 수십년 간 겪은 불편함 등의 피해에 대해, 국가가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은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졌습니다. 원고들은 판결에 반발해 대법원에 상고했습니다.

'대체할 수 있는 권리'라는 국가…대법관의 '일침'은?



" "26년 지난 지금도 올해도 저는 아직도 음식점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들어갈 수 있는 카페를 1시간 동안 찾지 못해서 결국 길에서 이야기하다가 인사하고 헤어졌습니다." - 배융호/한국환경건축연구원 이사(원고 측 참고인) "

공개변론에 참여한 휠체어 장애인 당사자들은 일상에서 겪는 어려움을 생생하게, 그리고 절절하게 풀어냈습니다. 수치로도 설명했습니다. 원고 측 이주언 변호사는 "편의점의 전국 편의시설(경사로 등) 설치율은 0.35%였고, 서울 전체 편의점 중 바닥 면적이 300제곱미터 이상(편의시설 설치 의무가 있는 면적 기준)인 곳은 1.4%"라고 말했습니다. "점포용 경사로는 3만 5000원에서 37만 원에 판매되고 있다"고도 덧붙였습니다.

피고 대한민국 측은 그동안 장애인 이동권과 접근권 개선을 위해 충분히 노력해왔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권리에는 한계가 있다"는 변론을 펼쳤습니다. 정부 측 변호인은 "소매점 접근권은 다른 권리에 비해 대체 수단이 많다는 특성이 있다"며 "온라인으로 구매하거나 편의시설이 갖춰진 대형마트를 이용할 수 있고, 활동보조사와 함께 구매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때문에 "넓게 봤을 때 (소매점에 대한 접근권)은 다양한 선택권의 관점에서 한계가 있는 권리"라고 말했습니다.

오경미 대법관은 "쉽게 대체되는 권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에 좀 놀랐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어 "그동안 국가가 장애인의 교통 편의와 활동 지원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온 것은 인정한다"면서도 "하지만 이동권과 접근권의 불균형이 심각하고 장기간 방치되어왔는데, 민간 영역에 예산을 지원해 해결할 가능성은 없었던 것이냐"고 질문했습니다.

" "활동 지원인을 붙여서 마트에 가는 것으로 대체가능하고, 혹은 집에서 온라인으로 주문하는 것으로 대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장애인에게 집에만 있으면서 온라인 하라는 것이고…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것이 계획적으로 발생합니까? 그때그때 필요한 카페나 편의점, 뭐든지 이용할 수 있는 일상생활에서의 즉자성을 전혀 구현하지 못하고, 미리미리 계획해서 활동 지원 불러서 마트나 가라고 하는 것은 (중략) 대체적인 권리라는 것으로 그렇게 쉽게 치환되는 이야기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 오경미 대법관 "

조희대 대법원장도 "(편의시설 설치 의무가 있는 소매점이) 3%~5%에 불과하다면, 숫자 자체로도 동등하게 이용하고 접근할 수 있는 권리가 아예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 아니냐"며 "50%이상이라도 해놓았으면 모르겠지만, 너무나 입법 의무를 게을리 한 점이 숫자 자체로 명백해보인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날 공개변론은 4시간에 걸쳐 진행됐습니다. 만약 원고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진다면, 다른 휠체어 장애인들도 소송을 내 위자료를 받게 될 수 있습니다.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의 추가 심리를 거친 뒤, 이르면 2달, 늦어도 4달 안에 선고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조해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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