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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토)

편의점 못 간 ‘휠체어 장애인들’이 법원을 찾은 사정 [법조 Zoom In : 법정시그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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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 사건 어떻게 됐더라?” 할 때 정작 결말을 모르는 경우가 있지 않으셨나요? 사건은 ‘수사기관의 수사나 당사자의 소 제기’로 시작되지만, 결국 ‘법원의 판결’로서 끝이 납니다. 사건의 시작과 끝 사이, 법정에선 치열한 사실관계와 법리 다툼이 벌어지고 이 내용이 판결문에 기록됩니다. 법정의 가장 앞자리, 1열에서 사건의 디테일과 결말을 전해드립니다.

23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휠체어를 탄 한 장애인이 리프트에 올랐습니다. 리프트를 타고 이동한 곳은 2층 대법정. 도착한 그곳에는 장애인 수십 명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죠.

동아일보

조희대 대법원장이 23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장애인 접근권 국가배상 사건 관련 전원합의체 공개변론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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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이곳에 모인 건 ‘장애인 접근권’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이숙연 대법관)의 공개변론이 진행됐기 때문입니다. 이날 법정에서 다룬 문제를 쉽게 풀어보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1층에 있는 편의점, 약국, 카페 등 소규모 매장에 휠체어를 타고 드나들 수 있는 경사로가 없다. 이런 문제를 국가가 24년간 방치했다면, 위법하다 볼 수 있을까. 또 장애인에게 손해배상을 해야 할까.
단순하지 않은 문제입니다.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각종 시설에 접근할 권리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소매점을 운영하는 소상공인들의 경제적인 부담, 이를 지원하기 위한 사회경제적인 비용이 든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행정입법 부작위’(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음)에 대한 사법부의 판결을 구하는 소송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큽니다. 이 사건 판결 선고 이후, 장애인 접근권이 아닌 다른 사안에 대한 ‘행정입법 부작위’의 경우 같은 법리가 적용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사회경제적으로 미칠 파급효과가 크다 보니, 대법원은 의견 수렴이 필요하다고 보고 공개변론을 연 것입니다. 이날 전원합의체 공개변론에는 대법원장과 대법관 12명이 참석했습니다. 이번 공개변론은 조희대 대법원장 취임 이후 처음이란 점에서도 의미가 있었죠.

〈전원합의체란 무엇일까요?〉
대법원에는 3개의 소부가 있고, 각 소부는 대법관 4명으로 이뤄져있습니다. 대법원은 일단 소부에서 처리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여기에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은 사건이나 사회적으로 파장이 예상되는 사건이 전원합의체로 회부됩니다. 전원합의체는 대법원장이 재판장이 되고, 대법관 전원의 3분의 2 이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편의점에 가지 못한 장애인들

사건의 시작은 2018년이었습니다. 지체장애인 등 3명이 GS리테일과 정부를 상대로 “장애인들의 편의점 이용이 부당하게 제한되고 있다”며 차별구제 청구 소송을 낸 것이죠. 1998년에 만들어진 구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은 ‘바닥면적 합계가 300㎡ 이상인 소매점’만 경사로 등을 설치할 의무가 있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바닥면적 합계가 300㎡ 이상인 소매점’이 너무 적다는 점이었습니다. 2019년 기준 전국 편의점 중 1.8%만이 이 경우에 속했죠. 이에 장애인인 원고 측은 “국가가 해당 시행령을 20년 넘게 개정하지 않아서,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장애인 접근권이 제한됐다”며 국가배상을 청구했습니다.

앞서 1심과 2심은 “정부의 고의·과실이 인정되지 않는다”며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특기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2심 재판 중인 2022년 4월 해당 시행령이 개정되었는데요. 경사로 등을 설치할 의무가 있는 소매점 기준을 ‘바닥면적의 합계가 50㎡ 이상의 시설’로 낮춘 겁니다.

이 사건에 대해 대법원이 주목하는 쟁점은 2가지였습니다. 첫째, 국가가 옛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을 장기간 개정하지 않은 것이 ‘입법 부작위의 위법성’으로 볼 수 있는지. 즉 정부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 위법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둘째, 위법성이 인정된다면 손해배상 책임이 성립하는지.

이날 공개변론에서는 위 두 쟁점에 대해 양측의 변호인단과 참고인들이 열띤 주장을 펼쳤습니다. 첫 번째 쟁점부터 따라가보겠습니다.

● 국가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나?

국가가 면적 제한 규정을 포함하고 있는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을 24년간(1998년~2022년) 개정하지 않은 것을 두고 ‘위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원고 측 대리인 이주언 변호사는 “시행령이 만들어진 1998년부터 20여년 간 통계를 보면 전국에 면적 300㎡ 이상 시설이 0.1%에서 5% 남짓”이라며 “결국 해당 시행령은 입법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헌법상 기본권에 해당하는 접근권을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피고 측은 “부족하나마 국가는 장애인 접근권 향상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해왔다”며 장애인 관련 각종 제도와 법률 제·개정을 열거했습니다. 그러면서 “소매점 접근권은 온라인을 통해 구매하거나 장애인 편의시설이 갖춰진 대형마트를 이용하는 등 대체수단이 많다는 특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양측의 변론이 끝나고선 대법관들의 질문이 이어졌는데요. 눈에 띄었던 것은 정부 측 변론에 대한 질책이 포함됐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으로 오경미 대법관은 “24년간 이런 상태가 유지됐다는 것은 편의점, 약국, 카페, 제과점 등 많은 곳에서 장애인들이 활동하지 못했다는 뜻인데 피고 측에서 이를 쉽게 대체할 수 있는 권리라고 이야기하는 데에 조금 놀랐다”라며 “그 말은 장애인에게 집에만 있으면서 온라인 쇼핑만 하라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조희대 대법원장 또한 “전체 시설 중 장애인이 접근할 수 있는 비율을 50%라도 해놓아야 ‘우리는 할 만큼 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현재 3~5%밖에 안 되는 수치를 보면, 입법 의무를 게을리했다고 볼 수 있지 않나”라고 말했습니다.

● 국가가 배상해야 하나?

이날 변론은 약 3시간 30분간 이어졌습니다. 양측이 쟁점마다 팽팽히 맞섰기 때문입니다. 그 두 번째 쟁점은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국가의 ‘입법 부작위’가 위법하다면, 이를 이유로 국가가 배상할 책임이 생기는 걸까요?

이에 대해 원고 측은 “수차례 개정하라고 권고했음에도 오랜 기간 방치해왔기 때문에 원고들이 상당한 침해를 받은 것”이라며 “입법 부작위가 접근권 침해의 근본적인 원인이므로 인과관계가 상당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국가 재정 문제로 배상책임 자체가 부정돼선 안 된다”며 손해배상금으로 각 500만 원을 언급했습니다.

반면 정부 측은 시행령 내용과 피해자들의 정신적 고통 사이에 인과관계가 부족한 점, 법을 제·개정하는 과정에서 담당 공무원들의 고의·과실이 없는 점을 들어 반박했습니다. 참고인으로 나선 안병하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접근권 침해로 인해 어떠한 현실적 손해가 발생했는지에 대한 증명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원고 측에 대한 질문이 많았습니다. 서경환 대법관은 “이번 손해배상 금액에 따른 파급효과가 문제”라며 “현재 지체장애인이 약 21만 명인데 이분들께 100만 원씩만 지급해도 2100억 원이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원고 측은 “배상 책임 자체가 인정되는 게 중요하다”며 “1인당 100만 원, 그보다 적은 10만 원이라도 인정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휠체어 이용자라고 해서 누구나 정신적 손해가 발생하는 것이냐”는 권영준 대법관의 질문에는 “아니다”라며 교도소에 수감 중이거나, 장애인 거주 시설 등에 수용돼 소매점을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를 예외로 언급했습니다.

대법원은 위 쟁점들을 검토해 최종토론을 거친 뒤 선고할 예정입니다. 판결 선고는 2~4개월 이내에 이뤄질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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