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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7 (일)

누가 러닝을 ‘돈 안 드는 운동’이라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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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닝화에도 계급이 있다?


역사적으로 러닝은 불황에 주목받았다. 1970년대 미국을 강타한 ‘러닝 붐(Running boom)’이 대표적이다. 제1차 석유 파동과 인플레이션 등이 겹친 1970년대 초반은 미국의 혹독한 경제 불황기였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1979년 ‘The Runner: Phenomenon Of the 70s’ 제목의 기사로 1970년대 미국 러닝 붐을 정리한다. 워싱턴포스트는 당시 뉴욕 로드 러너스 클럽 회장의 인터뷰를 인용하며 “소방관, 우편배달부, 비서가 러닝을 시작하며 열풍이 불었다”고 설명한다. 쉽게 말해 골프나 테니스 등 기존 운동과 달리 비용 부담이 적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이 1970년대 러닝 붐의 이유라는 의미다.

국내 러닝 붐이 시작된 지난해를 돌이켜보자. 1970년대 미국과 닮은 부분이 있다. 지난해 국내 경제 키워드는 고물가와 고금리, 경기 침체였다. 플렉스 열풍으로 각광받던 골프와 테니스 인기는 자연스레 식었고 비용 부담이 적은 러닝이 이를 대체했다. 하지만 올해 들어 러닝 트렌드가 변했다는 말들이 나온다. 특히 젊은 층을 중심으로 ‘돈 안 드는 운동’에서 ‘돈 드는 운동’으로의 변화가 감지된다. 러닝화 품귀 현상을 시작으로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러닝화 계급도’까지 등장할 정도다. 홀로 조용히 뛰던 이미지도 옛것이 됐다. 여러 명이 모여 함께 뛰는 ‘러닝 크루’가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르면서다. 달라진 러닝 트렌드를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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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9일 배달의민족 운영사인 우아한형제들이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평화의광장에서 개최한 달리기 행사 ‘2024 장보기오픈런’에는 2000명이 참가했다. (우아한형제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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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 1 러닝화 품귀

급 나누는 분위기도 조성

러닝 붐은 관련 시장 확대로 이어졌다. 수치로도 나타난다. 국내 최대 패션 커머스 ‘무신사’에 따르면 올해 7월부터 9월까지 약 3개월 동안 러닝화 카테고리 거래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53% 증가했다. 특히 완연한 가을 날씨에 접어든 9월 거래액은 전년 대비 80% 늘었다. 한국섬유산업연합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운동화 시장 규모는 4조원을 넘어섰다. 이 중 러닝화 시장 규모는 25%(약 1조원) 정도로 추산된다.

시장이 커지며 러닝 시장의 핵심 제품인 러닝화 모델도 세분화됐다. 이 과정에서 20만원이 넘는 고성능 러닝화(카본화)가 쏟아졌다. 초기에는 업계에서도 ‘누가 고성능 러닝화를 사겠느냐’는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고성능 러닝화 없는 러너를 찾아보기 힘들다. 발매가만 수십만원이 넘는 모델도 품귀 현상이 생길 정도다. 오죽하면 일부 모델은 리셀(비싼 값에 되파는 거래) 시장에서 발매 가격의 2배 수준 가격에 거래된다. 직장인 러닝 크루를 운영하는 최정훈 씨는 “모델도 모델이지만, 색상 등에 따라 리셀 가격이 천차만별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틀린 말이 아니다. 나이키 ‘알파플라이’ 시리즈 중 하나인 ‘에어 줌 알파플라이 넥스트% 2 프로토’ 제품은 지난 9월 리셀 플랫폼 크림에서 65만원(250㎜)에 거래됐다. 발매 가격(32만9000원)보다 97.5% 비싸게 팔린 셈이다. 최근 국내 러너 사이에서 선호도가 높아진 스위스 러닝화 브랜드 온러닝의 ‘클라우드틸트 브라운’ 여성 제품(250㎜)도 지난 10월 14일 31만9000원에 거래됐다. 발매가는 19만9000원이다. 일본 운동화 브랜드 아식스의 ‘슈퍼블라스트 선라이즈 레드 블랙’도 최근 거래가 35만원을 기록했다. 발매가(19만9000원)를 훌쩍 뛰어넘는 가격이다.

타 브랜드 협업 컬래버레이션 모델은 부르는 게 값이다. 온러닝과 스페인 럭셔리 브랜드 로에베가 협업한 ‘로에베 × 온러닝 클라우드틸트 샌드’ 여성 모델(235㎜)은 지난 10월 10일 크림에서 140만원 신고가를 기록했다. 발매가는 65만원이다. 일부 모델은 발매가 대비 3배 수준에 거래된다. 국내 패션 브랜드 포스트 아카이브 팩션(파프) 협업 모델도 상황은 비슷하다. ‘온러닝 × 파프 클라우드몬스터2 문더스트 초크’는 지난 10월 17일 66만원(270㎜)에 거래됐다. 발매가(27만9000원)보다 136.5% 비싼 가격이다.

가격이 치솟고 있지만 러닝화를 향한 러너들의 관심은 식을 줄 모른다. 오죽하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러닝화를 수준에 따라 줄 세운 ‘2024 러닝화 계급도’가 등장할 정도다. 온라인 커뮤니티 다나와가 러닝 블로그를 운영하는 인플루언서 ‘멸치’의 자문을 받아 만든 계급도다. 과거 회자됐던 ‘명품 브랜드 계급도’ ‘시계 계급도’ ‘부동산 급지표’를 떠올리게 한다. 높은 계급일수록 가격도 비싸다. 계급은 총 6개로 구분된다. 최상급 레이싱화로 구성된 ‘월드클래스’부터 입문자를 위한 ‘입문용’ 등이다. 월드클래스로 분류된 아디다스의 ‘아디제로 아디오스 프로 에보1’ 모델은 발매가부터 상당하다. 발매가는 59만9000원. 그럼에도 구할 수가 없어 프리미엄이 붙어 중고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황이다. 물론 입문용이라고 가격이 크게 저렴한 편도 아니다. 입문용으로 소개된 호카의 ‘클리프톤9’ 모델 발매가는 18만9000원. 현재는 30만원 가까운 가격에 리셀 시장에서 거래된다. 다나와 측은 “선택의 폭이 다양해지면서 일반 러너도 자신에게 알맞은 러닝화를 찾기 위해 고민하게 된다”며 “이를 돕기 위해 2024년 러닝화 계급도를 제작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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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러닝과 로에베가 협업한 ‘로에베×온러닝 클라우드틸트’ 모델. (로에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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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닝화 계급도 2024’. (다나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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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 2 고프코어 잇는 러닝코어

디스트릭트 비전·새티스파이 각광

러닝 인기는 패션업계로도 번졌다. 운동 붐과 패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기 때문이다. 대표 사례가 코로나19 기간 등산 인기가 커지자 패션업계를 강타한 ‘고프코어’ 붐이다. 등산을 기반으로 한 패션이다. 아크테릭스와 살로몬 등 고프코어 브랜드가 인기를 끌었다. 이후 여성 풋살 등이 주목받으며 블록코어가 떠올랐다. 축구·럭비 유니폼 등을 일상복으로 입는 패션이다. 이를 이어받은 게 러닝코어다. 러닝화뿐 아니라 러닝 관련 의류 등이 일상복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 패션업계 관계자는 “최근 패션 시장에서 주목받는 온러닝과 새티스파이, 호카오네오네, 디스트릭트 비전 등은 모두 러닝에 뿌리를 두고 있는 브랜드”라면서 “특히 새티스파이와 디스트릭트 비전은 러닝화가 아닌 의류로 주목을 받는 경우인데, 독특한 디자인의 조끼나 통기가 잘되고 편안한 원단 등이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게 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2015년 설립된 프랑스 브랜드 새티스파이는 일명 ‘러닝 조끼’로 불리는 제품과 러닝 캡 등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디스트릭트 비전도 모자와 선글라스 등 다양한 제품으로 러닝코어룩을 선도 중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주식 시장에서도 러닝코어 브랜드가 화두다. 증시에 상장된 브랜드는 실적 고공행진에 힘입어 밸류에이션이 높아지는 단계다. 미국 나스닥에 ‘온홀딩스(ONON)’로 상장한 온러닝이 대표적이다. 트라이애슬론(철인 3종) 선수 출신 올리비에 베른하르트 창업자가 ‘발이 편한 러닝화’를 목표로 만든 브랜드다. 올해 초 주당 25달러 수준에 머물던 주가는 최근 50달러 안팎을 기록 중이다. 사업 초기에는 유럽과 미국 중심으로 사업 성과가 나왔다가 최근에는 일본과 한국 등 아시아 시장을 강타한 덕분이다. 특히 러닝화 수요만 늘던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의류까지 함께 인기다. 온러닝은 한국 직매장 설립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아시아에선 일본 온러닝 도쿄 오모테산도 플래그십 매장(온 도쿄) 등만 운영 중인데 한국까지 범위를 넓히는 것이다. 나스닥만 러닝코어가 화제인 건 아니다. 일본 도쿄 거래소에 상장된 아식스와 미즈노 주가도 우상향 중이다. 특히 미즈노는 올해 초 주당 3935엔에서 10월 15일 8620엔을 기록했다. 상승률만 119%다.

현상 3 홀로 뛰던 러닝은 옛말

곳곳서 갈등 현상…지자체 나서기도

과거 러닝은 ‘혼자 하는 운동’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아니다. 일종의 동호회 개념인 ‘러닝 크루’가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달리기를 뜻하는 영어 러닝(running)과 모임을 의미하는 크루(crew)를 합친 말이다. 러닝 크루 인기는 수치로도 나타난다. 네이버 커뮤니티 플랫폼 밴드에서 ‘러닝과 걷기’를 주제로 삼은 밴드는 3년 새 80% 가까이 늘었다.

하지만 많게는 수십 명이 함께 뛰는 러닝 크루가 늘면서 뜻밖의 부작용도 생기고 있다. 일부 러닝 크루가 산책로를 점령하다시피 뛰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최근 한 지역 커뮤니티에선 조용히 산책을 즐기는 이들에게 ‘비켜달라’고 외치는 러닝 크루가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온라인을 중심으로 ‘산책로 무법자’라는 비판이 나오는 배경이다. 소셜미디어(SNS) 속 인증샷 열풍과 함께 트렌드처럼 자리 잡고 있는 ‘시티런(도심 한복판을 뛰는 행위)’도 문제다. 도심 특성상 좁은 도보도 나오는데, 이를 크루 단위로 뛰다 보니 위험천만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러너들 사이에서도 “페이서 등 스태프가 있다고 해도 크루 단위로 시티런을 하는 게 맞느냐”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다.

민원이 계속되자 지자체 중 일부는 러닝 크루 활동을 제한하고 나섰다. 서울 서초구청은 지난 10월 1일부터 러너에게 인기가 많은 반포종합운동장 러닝 트랙에서 5인 이상 단체 달리기를 제한했다. 서초구는 “10인 이상의 친목 동호회일 경우 4인·3인·3인 등 조를 구성하는 것을 권고한다”며 “트랙 내 인원 간격을 약 2m 이상으로 유지해달라”고 밝혔다. 서울 송파구도 석촌호수 산책로에 ‘3인 이상 러닝 자제’를 요청하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서울 성북구는 ‘우측 보행·한 줄 달리기’라고 적힌 현수막을 써 붙였다.

일부 러닝 크루의 민폐 행위로 러닝 크루 전체를 마녀사냥하는 건 잘못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홀로 러닝을 즐기다 지난해부터 러닝 크루에 가입해 활동 중인 김 모 씨는 “최근에는 러닝 크루도 일종의 ‘매너 규칙’ 등을 정립해 공유하고 소위 말하는 민폐 행위를 근절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최창원 기자 choi.changwo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81호 (2024.10.23~2024.10.2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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