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0.29 (화)

“더 일하고 싶어도 퇴직… 정년 연장 논의 전 임금체계 개편해야”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고령자 계속고용 전문가 간담회

동아일보

대통령 직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는 14일 서울 종로구 경사노위 사무실에서 ‘고령자 계속고용’을 주제로 전문가 간담회를 진행했다. 왼쪽부터 송시영 서울교통공사 올바른노조 위원장, 이철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권기섭 경사노위 위원장,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내년 한국은 65세 이상 고령자가 인구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한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늙고 있는데 노인 빈곤율은 38.1%(2022년 기준)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현 상태가 이어지면 2072년 생산연령인구(15∼64세)의 비중(45.8%)이 절반 아래로 떨어지며 성장동력도 크게 약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대통령 직속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는 이런 현실을 감안해 노사정 대화를 통한 고령자 계속고용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고령자 계속고용은 정년 연장, 퇴직 후 재고용 등을 포함해 나이가 들어도 계속 일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경사노위는 고령자 계속고용과 관련해 내년 1분기(1∼3월)까지 노사 합의를 이끌어내는 게 목표라고 밝힌 바 있다.

경사노위는 14일 서울 종로구 경사노위 사무실에서 전문가 간담회를 열고 바람직한 계속고용 방안에 대한 각계 의견을 논의했다. 권기섭 경사노위 위원장 주재로 열린 간담회에는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 송시영 서울교통공사 올바른노조 위원장, 이철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가 참석했다. 이들은 세부적인 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계속고용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속도를 내야 한다는 점에 공감했다.

● 연금개혁이 불붙인 정년 연장 논의

권 위원장은 “지난달 4일 정부가 국민연금 의무가입 연령을 현재 59세에서 64세로 높이는 것을 검토하는 개혁 방안을 내놓으면서 계속고용에 대한 사회적 논의의 필요성이 더 커진 것 같다”며 간담회를 마련한 배경을 설명했다.

이에 이 교수는 “노후 빈곤과 소득 크레바스(직장에서 나온 뒤 국민연금을 받을 때까지의 소득 공백)에 초점을 맞춰 고령자 고용을 늘리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할 때”라고 동의했다. 김 고문도 “한국은 이례적으로 연금 수령 연령과 정년이 불일치한다”며 “장기적으로 반드시 일치하도록 바꿔야 할 부분”이라고 했다.

조 교수는 “법정 정년과 실제 은퇴 연령 사이의 격차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더 시급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5월 기준으로 ‘주된 일자리에서 퇴직하는 나이’는 평균 49.4세로 법정 정년인 60세보다 10.6세 낮았다. 조 교수는 “이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고 법적 정년만 연장하는 건 현실적이지 않다”며 “정년 연장 외에도 다양한 방안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송 위원장은 “고령화, 연금 개편에 따른 정년 연장의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청년 고용에 미칠 악영향도 고려해야 한다”며 “이를 최소화하도록 정년 연장의 시점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송 위원장이 이끄는 올바른노조는 20∼40대 조합원이 90% 이상이어서 ‘MZ(밀레니얼+Z세대) 노조’로 불린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2030년경이 되면 청년이 크게 줄어들기 때문에 정년 연장이 청년 고용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은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반면 조 교수는 “노동경제학회의 연구에 따르면 2016년 법적 정년을 60세로 연장했을 때 청년 고용이 16% 파괴된 것으로 나타났다”며 우려를 표했다.

다만 이 교수는 “인구 변화 자체만 봐서는 정년 연장이 당장 시급한 상황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생산연령인구가 빠른 속도로 감소하고 있지만, 여성 고용률 증가 등으로 향후 25년 정도는 총량적인 노동력이 부족할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 정년 연장 하려면 임금체계 개선부터

송 위원장은 “정년 연장을 시행하기에 앞서 임금체계 개편 등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서울교통공사 등 공공기관의 경우 2016년 60세 정년 의무화 시행 후 도입된 임금피크제를 두고 극심한 노사 갈등을 겪었고 현재까지도 후폭풍이 이어지고 있다.

경영계는 현재의 임금체계를 유지한 채 정년을 연장하면 기업의 비용 부담이 커지고, 생산성은 감소하는 등의 부작용이 크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전히 공공기관과 한국 기업 상당수가 연공서열에 따라 임금이 올라가는 호봉제를 중심으로 임금체계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100인 이상 사업장의 호봉급 도입률은 54.4%, 1000인 이상 사업장은 65.1%다. 정년 연장의 혜택이 대기업 정규직에게만 쏠릴 것이란 우려도 있다. 이에 참석자들은 모두 임금의 연공성을 줄이는 방식의 임금체계 개편이 우선적으로 진행돼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조 교수는 “민간기업의 임금체계에는 정부가 개입할 여지가 적기 때문에 임금체계 개선이 더 어려운 숙제”라며 “미국이나 영국처럼 직무 중심의 노동시장이 발달한 국가에선 맡은 직무에 따라 임금이 결정되지만 한국 노동시장에선 이를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고 했다. 또 “임금체계를 바꾸고 싶은데 어려움을 겪는 기업에 컨설팅 같은 지원을 확대하고 노사가 자율적으로 임금체계를 바꿀 때 걸림돌이 되는 법과 제도를 손질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김 고문은 “고령자들도 과거에 비해 임금을 일정 수준 낮추면서 고용을 늘리는 것에 대해 훨씬 전향적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또 “기대수명이 길어져 요즘은 일을 좀 더 해야 한다는 생각이 보편적”이라며 “자산이 어느 정도 축적돼 있는 경우 임금을 좀 낮추더라도 더 일하는 것을 선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 ‘한국형 계속고용’ 모델 만들어야

많은 노동 전문가는 한국의 계속고용 논의에 참고할 국가로 일본을 꼽는다. 일본의 법정 정년은 60세지만 사업주는 65세까지 고용확보 조치를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 방식은 정년 연장과 정년 폐지, 재고용 중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게 했다. 근로자가 원하면 65세까지 일할 수 있다 보니 사실상 정년이 65세인 것과 같은 효과를 내고 있다. 2021년에는 70세 근로자까지 취업확보 조치를 하도록 노력할 의무를 부과했다.

간담회 참석자들은 일본 모델을 참고하되 한국의 상황에 맞게 보완해야 한다고 봤다. 이 교수는 “일본은 정부 권고에 대한 기업의 수용성이 높고 협력적 노사관계가 정착됐다는 점에서 한국과 다르다”며 “한국의 경우 그렇지 않은 만큼 정부는 노사가 계속고용 논의에서 접점을 찾도록 중재하거나 표준을 제시하는 등 더 적극적 노력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조 교수는 “취업규칙 변경 절차 때문에 한국에선 일본처럼 선택지를 줘도 정년 연장 외에는 선택하기 어렵다”고 했다. 근로기준법 94조는 취업규칙을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할 경우 노조 또는 근로자 과반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그런데 재고용의 경우 취업규칙을 불리하게 변경하는 것에 해당할 수 있어 노조가 반대하면 도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60∼65세 근로자는 해당 조항의 예외로 두는 등의 법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2022년 기준으로 일본 기업의 70.6%는 인건비 부담이 작은 재고용을 선택한 상태다. 하지만 현지에선 재고용 이후 임금 삭감 폭이 크다는 문제점도 제기되고 있다. 이에 대해 조 교수는 “일본과 유사한 방식을 택할 경우 경사노위 내 업종별 위원회를 두고 각 업종에 맞는 표준 임금 규범을 만들 수 있다. 여기서 지나친 임금 삭감을 자제하도록 사회적 합의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 교수는 “일본에선 고용 연장으로 기존 임금의 75% 미만을 받는 경우 정부가 일부를 보전해 준다”며 “이 같은 대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 고령 친화적 노동시장이 근본적 해법

김 고문은 “당장은 정년 연장보다 고령자 재취업 시장을 체계화하는 것이 시급하다”며 “60세 이상 고령자 노동시장이 갈수록 커질 텐데 이에 대한 연구나 데이터 축적이 전혀 안 돼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재취업 시장을 ‘레몬마켓’에 비유했다. 제품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소비자들이 싼값만 지불하려고 하다 보니 낮은 품질의 상품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역량 있는 고령자가 재취업할 때 경비원 등의 단순 업무 일자리에 취업할 수밖에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 고문은 “기존 일자리와 재취업 일자리의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에 정년 연장 문제에 더 민감해지는 것”이라고 했다.

이 교수도 “건강하고 학력 높은 고령자가 갈수록 많아질 텐데 한국의 재취업 시장은 축구로 비유하면 1부 리그 선수가 바로 조기축구회로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라며 “남은 역량을 발휘할 2, 3부 리그를 만들어 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 방안으로 “60세 이상에 한해 각종 노동법 규제를 완화하는 방안이 있을 것”이라며 “장기적으로 보면 아예 정년 제도를 없애 나이와 상관없이 역량에 따라 노동시장에 남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송 위원장은 “어떤 형태이든 계속고용 제도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세대 간 갈등이 발생하지 않도록 사회적 대화를 통해 적절한 도입 시기를 결정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권 위원장은 “다양한 공론화를 거쳐 합리적인 대안을 마련하도록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주애진 기자 jaj@donga.com

ⓒ 동아일보 & dong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