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제시한 개념 중 하나가 ‘좁은 회랑(narrow corridor)’인데 이는 책으로도 나왔다. 국가(정부)와 사회(시장) 사이, 독재와 무정부 사이의 미세한 균형을 잘 잡아야 번영을 한다는 것이다. 말은 멋있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도대체 어디가 균형점인지 알기가 어렵다. 그래서 “좁은” 회랑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한국은 정부가 시장을 압도하는 리바이어던(구약성서에 나오는 바다 괴물의 이름으로 강력한 국가권력을 상징) 체제인가, 정부가 시장에 휘둘리는 리바이어던 부재의 국가인가? 둘 다 아니다. 한국은 코로나19 사태 시기에 강력한 통제정책도 군말 없이 따르는 사회이나 권력자가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는 것에 진정으로 분노하는 사회이다. 즉, “족쇄 찬(견제와 감시를 받는) 리바이어던”을 원한다.
이제 한국에서 정부와 시장의 균형을 잡는 일은 난도 최상급 추상예술 경지에 이르렀다. 그래서 권력자의 합리적이고 유연한 자세가 중요한데 현 집권세력은 이게 불가능해 보인다. 그들은 시장이 전 정권이라는 거대한 괴물정부에 눌려 고사 직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유를 목 놓아 외치는 것도 진심이다.
노벨위원회는 “유럽인들이 대규모로 세계를 식민지화할 때, 그 사회의 제도는 변화했다. 이러한 변화는 모든 곳에서 동일하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원주민 인구를 착취하고 자원을 수탈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다른 지역에서는 식민지 개척자들이 유럽 이민자의 장기적인 이익을 위해 포괄적인 정치적 및 경제적 시스템을 형성했다”고 그들의 연구를 설명했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권력자들은 각자 그들이 바라보는 곳이 다르다. 권력자들이 국가의 번영을 위해서만 노심초사한다는 것은 정치인들만 하는 얘기다. 권력자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에 따라 국가가 좁은 회랑이라는 균형에 가까이라도 갈 수 있는가, 아니면 밖에서 겉돌 것인가가 결정된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가의 미래를 위해 돌을 맞으면서 가겠다고 하지만 사회는 윤 대통령의 시선이 영부인에게 가 있다고 말한다. “(현 정부에서)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고 물을 때 누구든 “잘 모르겠다”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 솔직한 것이다. 윤 대통령의 시선은 김건희 여사에게 가 있는데 우리는 김건희 여사가 무엇을 바라보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은 권력자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이고 더 문제는 권력자가 족쇄를 차고 있지 않다. 이런 국가는 가뜩이나 찾기가 어려운 좁은 회랑을 찾아갈 수가 없다.
올해 9월 다론 아제모을루가 가디언에 기고한 칼럼의 일부이다. “억만장자들인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 일론 머스크는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으로도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다. 단순한 부(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억만장자들이 다양한 주제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가진 천재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이들은 주요 소셜미디어 플랫폼과 같은 중요한 소통 수단을 통제하고 있다.” 그가 주의 깊게 보는 것은 단지 정치권력만은 아니다. 그는 전문성 없이 여러 분야에 얕은 지식만 가진 사람들이 지나치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상(The Dictatorship of Dilettantism)을 비판하고 있다.
나는 최근 한국의 금투세 논란을 보면서 이게 비단 미국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5만 고액자산가의 세금을 없애면 개인투자자 1400만이 혜택을 누린다는 이 기적의 논리가 힘을 받게 된 데에는 물밑에서 열심히 움직이는 시장권력자들의 역할이 상당할 것이다. 그들 역시 족쇄를 차지 않은, 아니 소셜미디어라는 날개를 단 시장의 리바이어던이다. 그들의 맹렬한 활약도 역시 정부와 시장 사이의 좁은 회랑의 바깥에서 한국을 빙빙 돌게 만들 것이다. 10년을 고민해 여야 합의로 만든 조세체계도 한 방에 날려버리니 말이다.
이창민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 |
이창민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
▶ 매일 라이브 경향티비, 재밌고 효과빠른 시사 소화제!
▶ 짧게 살고 천천히 죽는 ‘옷의 생애’를 게임으로!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