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씨엘. 코스모폴리탄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그녀에겐 품위가 있었다. 미끈한 선글라스를 비스듬히 걸치고 마이크를 쥘 때에도, 콜라를 쏟을 때에도, 아무 말 않고 눈썹을 까딱 들어올릴 때에도. 고개를 꼿꼿이 치켜 든 채 씨엘은 “내가 제일 잘 나가”라 선언했고, 과연 그랬다. 밀레니얼의 시대, 씨엘은 독보적인 존재였고 투애니원(2NE1)의 ‘내가 제일 잘 나가’는 거리마다 넘쳐 흘렀다. 그렇다고 씨엘이 나르시시즘에 빠진 아티스트였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동시에 씨엘은 노래했다. “I think I'm ugly, and nobody wants to love me.” (난 내가 못생겼다고 생각해. 그리고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이 심금을 울리는 구절은 노래방에 가면 (특히 여고 앞의) 거의 모든 방마다 돌림노래로 쩌렁쩌렁 울렸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귀엽거나 예쁘거나 섹시했던 2세대 여자 아이돌 한가운데 투애니원(2NE1) 씨엘의 독특하고 강력한 가창과 래핑은 언제나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렸다. 인정욕구, 콤플렉스, 자기혐오… 때로는 자신에 대한 넘치는 자긍심에, 때로는 뼈아픈 비애에 빠지며 어떤 ‘오빠’도 아닌 ‘나 자신’에 탐닉했던 아티스트는 이윽고 “난 나쁜 기집애”라 외치며 솔로 아티스트로 거듭난다. 스스로를 ‘언니’라 칭하는, 디바의 탄생이었다.
“저는 실제로도 여동생이 있어 언니라는 단어가 익숙해요. 제가 노래하는 ‘시스터후드’ 속 언니는 누구보다 다정하고, 파워풀한 존재죠.”
씨엘에게 가장 궁금했던 걸 물었다. 스스로에 대한 긍지와 미움을 어떻게 그렇게 깊게 파내려 갔냐고. 어떻게 탐구했고, 마주했고, 노래했냐고. 씨엘은 말했다.
“저는 스스로에 대한 감정에 항상 솔직했어요. 저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 긍정적인 감정 모든 걸 온전히 느낀다는 건 제게 큰 선물이에요. 저는 뭔가를 받아들이고 느끼고 소화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편인데 오랜 시간을 들여 스스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관찰하면 나 자신에게 가졌던 감정들이 정화되더라고요.”
가수 씨엘. 코스모폴리탄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당신은 그런 당신을 사랑하나요? 씨엘은 조금 뜸을 들이더니 답했다. “저는 저 자신에게 관심이 많아요. 그렇게 표현하고 싶네요.” 이 질문에 나올 수 있는 많은 답 중 보기 드물게 담백하며 세련된 답변이었다. 이 우아한 답을 내놓기까지 그녀가 쌓아 올린 역사는 어땠나. 어린 시절 일본과 프랑스에서 자란 ‘TCK’(Third Culture Kids·제3문화 아이들)인 씨엘은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접하며 모두가 다르다는 걸 일찍부터 알게 됐다. 언어와 문화가 수시로 바뀌는 환경 속에서 몸으로 할 수 있는 춤을 꾸준히 췄다. 춤의 언어는 어디서든 같았고 거기서 안정감을 찾았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씨엘은 소속집단에서 좀 달랐고 여전히 다른 존재다. 아웃사이더라는 기분을 느껴본 적은 없을까?
씨엘은 웃었다. “저는 항상 그런 기분을 느껴요. 그런데 그건 누구나 그렇지 않나요? 모든 사람은 다 다르기에 각자가 내가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기분을 느끼겠죠. 저는 늘 그런 결핍의 감각에서 호기심이 생겼고 새로운 게 알고 싶어지곤 했어요. 거기에서 제 음악도 출발했고요.”
결핍의 감각에서 호기심을 찾고, 자기만의 노래를 지어 부르는 일… 그러니까 없는 것에서 출발해 무언가를 만드는 일, 창작하는 동력으로 쓰는 일. 근사한 이야기였다. 만 18살의 나이로 데뷔해 33살이 될 때까지 반평생을 그렇게 보내온 그에게 그동안 얻은 것과 잃은 것에 대해 묻자, 그는 담담하게 답했다. “제가 이룬 건 여러분 모두가 다 같이 봤어요. 또한 제가 잃은 것들도 모두가 보고 느끼시지 않았을까 싶네요. 저는 세상 앞에서 컸잖아요.”
가수 씨엘. 코스모폴리탄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담대하고도 품위를 잃지 않는 화법을 구사하는 씨엘에게 다소 짓궂은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씨엘은 씨엘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전 제가 누군지 정의 내리지 않으려 해요. 그렇게 하면 괴로워지거든요.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또 다른 저를 발견할 수 있는데, ‘사실 난 이런 사람인데’라고 생각한다면 그 환경에서 왜 저 자신이 아닌지 괴롭겠죠. 아마도 전 누군가에겐 좋은 언니일 거고, 다른 누군가에겐 좋은 친구일 거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적일 수도 있겠죠. 모두가 그렇듯이. ‘나’는 계속 업데이트되는 거예요.”
그것은 어떤 말보다 씨엘을 정확하게 설명했고, 이제 씨엘의 여유가 이해가 됐다. 또한 내가 찾던 답이기도 했다.
어제는 잘 했는데 오늘은 왜 이러지? 나는 평생을 마른 사람이었는데 왜 요즘 살이 쪘지? 저번 회사에서 이런 캐릭터였는데 이번 회사에선 왜 다른 캐릭터가 됐지? 난 지난 연인에겐 좋은 사람이었는데 왜 이번 연애에선 이렇게 엉망진창이지? 고등학생 땐 성실한 학생이었는데 대학생이 돼선 왜 노는 애가 됐지? 1학년 땐 모두와 잘 어울리지 못했는데 2학년 땐 왜 친구가 많아졌지? 저 분야에서는 날 인정해주는데 왜 여기선 날 알아주지 않지? 원래 이렇지 않았는데, 사실 난 이런 사람인데…. 제가 원래 살이 이렇게 찌지 않았는데요, 어제 제가 잠을 잘 못 자서 그런데요, 아니, 제가 원래 이러는 사람은 아닌데요… 그런데,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지? 그런 질문들은 잠들기 전 베갯머리까지 달라붙어 영혼을 녹은 수프처럼 흉포하게 휘젓는다.
하지만 씨엘의 말처럼 우리는 고정되지 않은 존재다. 십 년 전의 나와 현재의 나는 세포 하나도 같지 않다. 인간이란 상대적이고 상호 관계 속에서 정의된다. 어떤 시공간에 놓여 있는지에 따라 다른 존재가 된다. 씨엘은 그걸 알고 있었다. ‘나’는 단 하나의 모습이 아닌 것. 누구에겐 적이기도 누구에게는 친우기도 한 것. 발전이든 퇴보이든 계속 변화하며 중첩되며 업데이트되는 것. 과거의 영광도 상처도 지금의 나를 정의하지 못하는 것.
가수 씨엘. 코스모폴리탄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씨엘은 세상 앞에서 자랐다. 사람들은 매섭게 회초리질을 하기도 온갖 미사여구로 찬양을 퍼붓기도 싸늘하게 외면하기도 했다. 쓴 맛과 단 맛을 봤고 비상하기도 침잠하기도 했다. 아시안, 여성, 아웃사이더… 그리고 이젠 어떤 경계에도 포획되지 않고 자유롭게 흐르는 단독자로서 씨엘은 이 자리에 서있는 것이다.
격동적으로 변화하는 거친 세상에서 허약한 자아의 경계선을 지키고 일말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법은, 역설적으로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수밖에 없다. 당신이 나를 A라 부르면 A일 것이요, B라 부르면 B일 것이다. 다만 A도 B도 나이지만 당신이라는 필터를 통한 나의 한 자락일 뿐. 나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어느 누구도 아닌 나의 순수한 양심일 것이다. 씨엘은 힌트를 주듯 넌지시 말했다. “저는 제 마음의 소리를 믿습니다. 마음은 생각과 다를 때가 많아요. 생각은 가끔 거짓말을 곧잘 하거든요. 하지만 제 마음은 속일 수 없는 거더라고요.”
나 자신을 탐구하기, 미워하기, 사랑하기, 부정하기, 자랑하기, 그 모든 ‘나’에 관하여 씨엘은 전문가였다. 화보 촬영 후 화장을 지운 그녀의 맨 얼굴이, 꼿꼿하게 세운 허리가, 미움과 사랑이 서린 거울 속 그 담담한 모습이 부러웠다. 한 차례의 웃음과 박수, 인사말들이 흩어지고, 그녀가 탄 밴이 주차장에서 유유히 빠져나가는 순간까지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막스마라와 함께한 <코스모폴리탄> 9월호 커버의 주인공, CL’ 인터뷰 보러가기 (클릭!)
‘이예지의 질투는 나의 힘’은?
이예지 <코스모폴리탄> 피처 디렉터에게는 세상 모든 사람을 질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부러운 점을 찾아내고야 마는 것이 그의 오랜 습관이지요. 이예지 디렉터가 <GQ>, <아레나>, <씨네21> 등 4개 매체를 거치며 지금껏 만난 사람들의 면면 중에 가장 열렬히 질투했던 구석을 파고든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질투는 나의 힘'은 격주 수요일 낮 12시에 만날 수 있습니다.
이예지의 질투는 나의 힘 |
이예지 <코스모폴리탄> 피처 디렉터
▶▶권력에 타협하지 않는 언론, 한겨레 [후원하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행운을 높이는 오늘의 운세, 타로, 메뉴 추천 [확인하기]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