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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1 (목)

환율방어에 106조 썼는데, 또 방어? 한은의 속사정 [마켓톡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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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연 기자]

"정부가 환율 안정을 위해 조성한 외평기금을 가져다 써도 한은이 발권력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할 여력이 있다." 이창용 한은 총재가 지난 10월 29일 국감에서 주장한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이 돈을 찍어서 달러화를 사고, 이를 외환시장에 공급해 환율을 낮춰야 할 만큼 위험한 상황이라는 걸까. 3년간 환율 방어에 106조원이나 투입했는데도 말이다. 더스쿠프가 자세히 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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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목(왼쪽)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기획재정위원회의 기획재정부 등 국정감사에서 대화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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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 10월 29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의 종합 국정감사에서 "외환시장에 개입할 탄약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외환시장 개입 여력은 외평기금(외국환평형기금)뿐만 아니라 한은의 발권력도 있다"고 발언해 파문이 일고 있다.

이 말은 정부가 세수 부족으로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존재하는 외평기금을 쓰려는 것에 불안감을 표하는 의원들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 참고: 외국환평형기금채권은 환율변동에 대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정부가 발행하고 보증하는 채권(국채)을 말한다. 외평채라고도 일컫는다.]

그렇다면 원‧달러 환율이 어느 정도이길래, 한은 총재는 '발권력'까지 언급한 걸까. 한은이 기준금리를 인하한 후 원·달러 환율은 끊임없이 오르고 있다. 환율은 9월 30일 달러당 1325.50원이었는데,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내린 다음 거래일인 10월 14일에 1359.00원으로 치솟았다. 환율은 10월 25일에는 달러당 1392.50원으로 1400원대에 근접했고, 10월 30일 오후 현재도 1383.70원으로 여전히 높다.

환율은 지정학적 위기나 미국 달러 가치의 전망 등에 따라서 달라진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미국의 기준금리가 그대로일 때 우리나라 기준금리가 낮아지면, 그만큼 원화 투자 수익률이 하락해 달러 수요가 증가하고, 이는 원·달러 환율의 상승으로 이어진다.

한은은 외환시장에서 환율이 급등락하면 개입한다. 먼저 한은이나 기획재정부 관계자들이 "환율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고 발언하는 구두개입에 나선다. 그래도 부족하면 한은이 외환시장에서 달러 매매에 직접 개입한다. 원·달러 환율이 급격하게 오르면 외환보유액 중 달러를 현물시장에 내다 팔고, 환율이 급격하게 하락하면 시장에서 원화로 달러화를 사들인다.

이때 한은이 원화로 달러를 확보한 후 방치하면 시중 통화량이 증가해서 금리와 물가에 영향을 준다. 그래서 통화안정채권(통안채)을 발행해 그만큼의 원화를 시중에서 흡수해야 한다. 한은은 지난 7월에 7조4000억 원 규모의 통안채를 발행했다. 8월과 9월엔 각각 6조4000억 원어치, 7조5000억 원어치, 10월에는 7조9000억 원어치의 통안채를 발행했다. 통안채 발행 한도는 금융통화위원회가 결정한다. [※참고: 통안채는 한국은행이 시중 통화량 조절을 위해 금융기관을 상대로 발행하고 매매하는 채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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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이 이런 식으로 최근 몇년간 환율방어에 투입한 돈은 100조 원이 넘는다. 외환당국인 한국은행의 분기별 외환 순거래 추이를 보면 지난 3년간 770억6000만 달러(약 106조6217억 원)를 환율방어에 썼다. 한은은 올해 1분기에도 환율을 방어하는 데 18억1500만 달러를 투입했고, 2분기에도 57억97600만 달러를 사용했다.

이창용 총재가 언급한 '발권력'은 어떤 식으로 환율에 영향을 줄까. 먼저 이 총재가 언급한 발권력의 의미부터 살펴보자. 이는 "한은이 외환시장에 참여할 수 있는 자금은 원칙적으로 외평채 발행 등으로 마련해야 하는데, 이를 돈을 찍어내는 권한인 발권력을 동원해서 충당하겠다"는 거다. 쉽게 말해, 한은이 시중은행 계좌에 돈을 이체해 달러화를 사들이고, 이를 외환시장에 풀어 환율을 방어하겠다는 얘기다.

그런데 지금이 발권력을 동원해서 환율방어에 나서야 할 만큼 위급한 상황인 걸까. 결론부터 말하면 우려는 되지만, 발권력으로 개입할 정도의 경제위기가 발생한 건 아니다. 환율은 외환시장에서 달러 수요가 높고, 달러 공급이 충분치 않으면 급등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수출은 지난 12개월 연속 금액 면으로 증가했다. 시중에 달러화가 부족하진 않다는 거다.

부분적으로는 여러 해 동안 우리를 괴롭힌 고환율이 외환 수급에는 어느 정도 도움을 줬다. 고환율은 수입품 가격을 올려서 물가를 즉각 끌어올리지만, 수출품 가격이 점진적으로 상승하는 덴 도움이 된다.

수출기업의 수출 금액이 증가하면 달러화의 안정적 공급도 그만큼 가능하다. 이 총재도 이날 국감에서 "수출 물량은 줄고 있지만, (수출) 가격은 올라가서 수출액수는 들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외평기금에 있는 달러화도 늘어났다. 정부가 지난 6월 3년 만에 10억 달러 규모의 5년 만기 달러화 표시 외평채를 발행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달러화 수급의 창고인 외환보유액은 2021년 말 4631억 달러보다는 줄었지만, 올해 9월 말 현재 4199억 달러로 전월보다는 늘어났다. 외환시장에 개입할 총알은 충분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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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부는 왜 하필 외국환평형기금에서 돈을 당겨써서 한은 총재가 발권력까지 언급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을까. 우리 경제가 1990년대 외환위기, 2000년대 금융위기, 최근의 레고사태를 겪으면서 외환시장 동향에 민감한데도 말이다.

정부의 재정 건전성 집착이 그 답이 될 수 있다. 외평기금은 금융활동에 가깝다는 이유로 정부의 통합재정에서 제외돼 있다. 외평기금 적자가 늘어나도 숫자상 재정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얘기다.

하지만 외평기금의 적자도 궁극적으로는 정부의 빚이다. 적자가 쌓이면 언젠가 통합재정에 포함하는 방법으로 갚아야 한다. 학계에서도 외평기금을 통합재정에서 제외하면 재정 건전성을 실제보다 과대평가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번 발권력 소동은 세수 부족에 시달리는 정부가 재정 건전성을 서류상으로나마 확보하기 위한 '해프닝' 정도로 요약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한정연 더스쿠프 기자

jeongyeon.han@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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